▲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 가장 사적인 공간인 이곳에서마저도 왕은 신독(愼獨)의 수양을 행해야 했다.
김종성
궁궐의 주인은 왕이라고 하지만, 궁 안에는 왕이 마음대로 쉴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궁궐에서 왕이 거처하는 3대 공간으로 정전(正殿), 편전(便殿), 침전(寢殿)이 있었다. 이 어디에서도 왕은 다리를 쭉 뻗고 편히 쉴 수가 없었다.
편전은 왕이 정무를 처리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의례를 거행하는 곳이었다. 정전은 조회 등을 거행하는 곳으로서 편전보다 훨씬 더 의례적인 장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공간들에서는 왕의 사생활이란 게 존재할 수 없었다.
'잠자는 곳'이란 의미의 침전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었지만, 여기서도 왕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성리학적 소양을 가진 사대부들이 지배하던 조선왕조 하에서, 왕은 홀로 있는 공간에서도 신독(愼獨)이란 성리학적 가치를 준수해야 했다. 특히 "군자는 홀로(獨) 있을 때를 반드시 삼가야(愼) 한다"는 <대학>의 가치관이 임금에게 강제되었다. 홀로 있는 동안에도 도덕적 수양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잔소리'가 항상 왕의 귓가를 맴돌았던 것이다.
일왕(소위 '천황')을 신으로 간주하던 1946년 1월 1일 이전의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임금도 불완전한 인간'이란 전제 하에 임금에게 열심히 수행하고 공부할 것을 강요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뭇 백성을 통치할 자격이 생긴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침전 같은 공간에서도 왕은 항상 행동거지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침전 안이라고 해서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다리 쭉 뻗고 앉아서 여자 이야기만 한다면, 그런 모습이 내시나 상궁들의 입을 통해 조정에까지 소문나고 그렇게 되면 국왕의 이미지에 흠집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에는 그런 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왕은 사생활이란 것을 포기하고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숨을 쉬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왕에게 사생활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사례③] 왕은 용변마저 편하게 볼 수 없었다비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여러 모로 편리한 점이 많다. 하지만, 비서가 화장실 내부의 '1인용 공간'에까지 따라 들어와서 용변 보는 일을 관찰하고 '용변의 결과물'까지 병에 담는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실제로 그런다면, 아마 화장실 가는 일이 무섭기까지 할 것이다.
왕들은 그런 생활을 했다. 내시(환관)들이 일종의 요강인 '매우틀'을 갖고 다니며 왕의 용변 시중을 들었던 것이다. 왕의 배설물을 '매우'라고 하고, 한자로는 '梅花'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을 담는 용기를 매우틀이라고 했다. 매우틀에 보관된 왕의 배설물은 궁중 의사들의 혀끝으로 옮겨졌다. 왕의 몸에 무슨 이상이 없는가 싶어서 의사들이 그 맛을 보았던 것이다.
상황이 이 정도였으니, 웬만한 왕들은 용변 보는 일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예민한 왕들은 음식 먹는 것조차 부담스러웠을지 모른다. 식사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배설물에서 풍길 냄새를 걱정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남몰래 궁녀를 만날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단 한 순간만이라도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지 않았을까? 그런 와중에도 최 숙빈·장 희빈 같은 궁녀 출신 여인들을 사귄 숙종 임금은 좀 특이한 편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례④] 왕은 사방의 감시 속에 '잠자리'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