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동이>.
MBC
중국 사신단의 숙소인 모화관에 위장 잠입했다가 감찰부 궁녀라는 신분이 탄로나 청나라 사람들에게 쫓기던 동이(한효주 분). 그는 모화관 마당에서 숙종(지진희 분)과 맞닥뜨렸다. 숙종은 국왕 신분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동안 숙종이 그저 한성부 판관(종5품)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동이. 그간 여러 차례 우연히 만난 이 마음씨 좋은 아저씨를 한낱 '서울시청 고위 공무원'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저씨가 국왕 신분으로 모화관을 방문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동이. 청나라 사람들에게 쫓기던 동이는 그저 반가운 마음에 '한성부 판관'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 아저씨가 옆의 측근으로부터 '전하' 소리를 듣는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순간 의아해하던 동이. 사태를 짐작했는지 경악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4일 방영된 MBC 드라마 <동이> 제14부는 그렇게 여운을 남겼다.
역사현장에서 부딪힌 인물들이 이미 그 이전부터 서로 인연을 갖고 있었다는 식의 설정은 종래의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예컨대, 정조 임금의 최측근인 홍국영의 야망을 다룬 예전의 어느 사극에서는 어린 시절의 정조와 홍국영이 길거리에서 스쳐가는 장면을 보여준 적이 있다. 또 <불멸의 이순신>의 작가도 이순신과 원균이 어릴 적부터 서로 알고 지냈을 것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한 바 있다.
<동이>에서도 동이 즉 최숙빈(숙빈 최씨, '동이'는 실명 아님)과 숙종 사이에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인연이 있었다는 설정을 두고 있다. 3월 30일의 제4부에서부터 숙종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동이의 아쟁 소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또 4월 6일의 제6부에서는 장악원 노비인 동이가 헛간에서 우연히 숙종을 만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계속 우연히 부딪혔고, 그때마다 숙종은 자신의 신분을 한성부 판관으로 위장하곤 했다.
그렇다면, 최숙빈과 숙종의 실제 만남은 어땠을까? 궁녀와 지존의 극적인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역사학은 일종의 재판과 같은 것이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진실이 있더라도, 그 진실을 입증할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심증만으로 그것을 역사학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 기록이나 유물로 입증되는 것만 역사학적 사실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적 사실이란 '실제 있었던 일'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사료에 의해 입증된 일'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에서는 역사학적 사실과 진실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된다. 이는 재판에서 사건 당사자가 알고 있는 진실과 판사가 인정한 사실이 다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과 관련하여서도 우리는 역사학적 사실과 진실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흔히 하는 말처럼 남녀 간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숙빈과 숙종이 처음 만난 때는 숙종 18년(1692)이었다. 이때 최숙빈의 나이는 23세였다. 최씨가 7세의 나이로 입궁한 때가 숙종 2년(1676)이므로, 두 사람은 무려 16년간이나 같은 공간에 살다가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아무리 궁녀의 행동반경이 제한되고 왕과의 접촉이 극히 힘들었다 해도, 한 공간에서 16년간이나 같이 살다 되면 어쩌다 한 번이라도 한쪽이 다른 쪽을 봤거나 혹은 양쪽이 서로를 봤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드라마 <동이>에서와 같은 드라마틱한 상황은 물론 없었겠지만, 그래도 세상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특히 남녀 간의 일이란 더욱 더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이 아주 없었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두 사람의 첫 만남에 관한 사료의 내용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사료에 기록된 것과 달리 실제로는 숙종 18년(1692) 이전에 이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는 것이다.
이들의 첫 만남을 증언하는 사료는 이문정(1656~1726년)이 지은 <수문록>이다. 이문정은 최숙빈보다 14세가 많은 사람이다. 동지중추부사(종2품, 차관급)를 지낸 이문정은 신임사화(1721~1722년) 이후 학문과 집필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인현왕후가 폐서인(廢庶人)되고 장옥정이 중전으로 있을 때인 숙종 18년(1692)의 상황을 보여주는 <수문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대왕(先大王, 죽은 임금 즉 숙종)이 하루는 밤이 깊어진 후에 지팡이를 들고 궁궐 안을 돌아다니다가 나인들의 방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한 나인(궁녀)의 방만 등촉이 휘황찬란하였다. 밖에서 몰래 엿보니,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나인이 두 손을 마주잡고 상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선대왕이 매우 이상히 여겨 그 문을 열고 연유를 물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