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당편액
이정근
한성에 입성한 청나라 사신은 모화관에서 여장을 풀고 이튿날 임금을 예방하는 관례를 깨고 창경궁으로 직행했다. 인조가 청나라 조문 사절을 양화당에서 접견했다.
"내가 고질을 앓고 있는 와중에 이런 참통(慘痛)한 상(喪)을 당하여 몸져누워 있다 보니 교영(郊迎)의 예까지 폐하였으므로 황공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이 누추한 자리에서 배칙(拜勅)의 의식을 거행하고자 합니다."청나라 칙사가 벽제관을 출발하면 임금이나 세자 또는 영의정이 서교(西敎)에 나가 영접하는 것이 예법이었다.
"병 때문에 칙서를 예식대로 맞이하지 못하는 것은 형편이 진실로 그러하니 이해하겠다. 거행하도록 하라."황제보다 기세등등한 통역관정사(正使) 공부 상서 흥능(興能), 부사(副使) 예부 계심랑 오흑(鄔黑)과 머리를 맞대고 구수회의를 한 역관 정명수가 고압적인 자세로 명했다.
"조선국왕은 칙서를 받도록 하라."이 상황에선 역관이 단순 통역자가 아니라 황제다. 인조가 칙서 앞으로 나아가 한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일배삼고두(一拜三叩頭)를 행하고 칙서를 받았다.
"황제는 조선 국왕 이휘에게 칙유(勅諭)하노라. 네가 보낸 사신이 북경에 와서 너의 세자가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듣고 깊이 놀랐다. 세자가 북경에 있을 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의 말과 행동이 눈앞에 선하여 애처로운 마음을 느낀다. 동국(東國)이 옛 어진 임금을 본받아 우리 황실을 따를 훌륭한 제후국의 국왕이 되리라 여겼는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헤아렸겠는가? 특별히 공부상서 흥능(興能), 예부계심랑 오흑(鄔黑), 통사관 고아마홍(孤兒馬紅)을 보내어 향폐(香幣), 생례(牲醴), 부수(賻禭)로 세자에게 유제(諭祭)하게 하였으므로 이렇게 유시하노라."고아마홍은 역관 정명수의 청나라 이름이다. 향폐(香幣)는 향과 폐백이고 생례(牲醴)는 술이며 부수(賻禭)는 부의로 수의를 준다는 뜻이다. 청나라는 소현세자의 장례가 6개월 국장이라면 아직 장사를 지내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조제사를 파견했다. 헌데 조선은 소현세자가 승하하자 2개월도 되기 전에 경기 고양에 장사지냈다. 향과 술을 올리고 수의를 주겠다니 어떻게 할 것인가? 아득했다.
"섭정왕이 서신을 보내왔으니 국왕은 받도록 하시오."정신이 혼미함을 느끼고 있을 때 정명수가 목청을 돋웠다. 인조가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췄다.
"황숙부(皇叔父)인 섭정왕은 조선 국왕에게 글로써 위문합니다. 갑자기 세자의 부음을 듣고 깊이 놀라고 애도합니다. 세자는 온화하고 돈후하고 문채가 금옥(金玉) 같았으므로 국왕을 도와 덕화를 펴서 우리 왕실의 훌륭한 제후가 되기를 기약했는데 어쩌면 그리도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우하지 않고 갑자기 중도에서 꺾어버린단 말입니까? 국왕 부자(父子)의 지극한 정리를 생각하면 어찌 그 슬픔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도르곤의 서신이다. 형 홍타이지의 명을 받은 도르곤은 동정군(東征軍)을 이끌고 조선을 정벌했던 인물이다. 조선을 유린한 도르곤은 소현세자를 데리고 심양에 도착했다. 볼모살이 하는 소현세자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도르곤은 홍타이지가 죽자 장성한 맏조카와 권력투쟁을 벌여 6세 조카 복림을 황위에 밀어 올렸다. 정권을 장악한 도르곤은 북경을 정벌하여 명나라를 패망시키고 섭정왕에 있었다.
"황제께서 세자의 상을 측은하게 여기시어 사신을 보내서 칙서로 유시하시고 또 조제(吊祭)까지 내리셨으니 황제의 은혜가 망극합니다."인조가 허리를 굽혔다.
'아버지의 나라' 라 떠받들던 명나라의 패망을 축복해야 하는 국왕"황제와 섭정왕이 세자의 부음에 놀라고 슬퍼하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조위하게 하셨습니다.""전하는 말을 듣건대 남경이 이미 평정되었다 하니 모두가 황제의 은덕입니다."아버지의 나라 명나라의 패망을 축복해야 하니 가슴이 쓰렸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이미 남경을 평정하였고 유적(流賊)의 두목 이자성은 팔왕(八王)에게 쫓기어 도망쳤습니다.""황제와 섭정왕의 큰 복입니다.""좌우 신하를 물리쳐 주십시오."칙사의 요청을 받은 인조는 환관 두 사람만 남고 사관을 비롯한 시종 신하들을 합문밖에 나가 있도록 했다. 역관 정명수가 사신의 말을 받아 인조에게 다가왔다.
"소현세자의 사망 원인을 소상히 밝히시오."
"별도의 문건으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동방의 사정이 좋지 않은데 이럴 때일수록 법과 원칙을 따라야 할 것이며 그 방법은 원손을 후사로 삼는 것이 인심에 부합할 것이오."
"소방에 계책이 있습니다."
"원손에 대한 관심은 섭정왕의 각별한 뜻이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밀담이 끝나고 칙사가 밖으로 나가자 인조가 도승지 김광욱을 불러들였다.
"칙사가 섭정왕의 뜻으로 전언(傳言)하기를 '동방의 인심이 좋지 않은데 이럴 때 어린 원손을 후사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할 듯합니다.' 하기에 내가 사실대로 고하였더니 사신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국왕에게 이미 정해진 계책이 있으니 동방의 행복입니다.'고 했다. 이대로 발표하라."
인조는 사신과의 밀담내용을 왜곡하여 발표하게 했다.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환관 두 사람이다. 환관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뻥긋했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진실(眞實)은 사실(事實)에 덮혀 묻힐 수 있다. 그것이 사실(史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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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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