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에 있는 신라 왕릉의 모습.
김종성
김춘추가 후계자로 떠오른 시점진덕여왕 치하에서 김춘추의 지위가 어땠을 것인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가 이미 정통성에서 이탈한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은 강제로 폐위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왕-김용수·김용춘-김춘추 라인에서는 원칙상 왕이 나올 수 없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진평왕이 한때 김용수를 천명공주와 결혼시킨 다음에 그를 후계자로 만들려고 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가 아니라 '진평왕의 사위 김용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훗날 김춘추의 혈통에서 신라 왕위가 계승된 사실 때문에 '김춘추가 이미 오래 전부터 왕재로 거론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순전히 결과론적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성골을 최상위에 두는 신분제 사회에서 성골 신분을 상실한 진지왕의 후손들은 일찌감치 왕위계승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은 선덕여왕 사후에 김용춘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선덕여왕이 죽은 시점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 16년(647) 음력 1월이고, 김용춘이 죽은 시점은 <화랑세기>에 의하면 동년 음력 8월이다. 김용춘이 선덕여왕보다 늦게 죽었는데도 그가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것은, 진지왕 폐위와 동시에 그 후손들이 왕위계승권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춘추가 외교 방면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또 김유신과 더불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분제 사회에서는 능력보다 신분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그런 후천적 능력만으로는 왕재로 거론되기 힘들었던 것이다.
왕보다 더 유능한 사람일지라도 결국에는 재상에서 그칠 수밖에 없는 게 왕을 중심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의 한계가 아닌가. 왕보다 더 유능한 사람으로서 왕의 밑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은 왕에게 버림을 받든가 아니면 왕을 내쫓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그것이 바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의 한계였다.
그래서 김춘추는 선덕여왕 시대는 물론이고 진덕여왕 시대에도 후계자로 거론될 수 없었다. 진덕여왕 사후에 성골남자는 물론이고 성골여자도 모두 사라진 상황 하에서 귀족들이 알천을 섭정으로 옹립한 사실은, 김춘추의 공식적 지위가 알천보다도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알천의 추천을 받은 김춘추가 귀족들의 추대를 세 차례나 사양한 것은, 세 번 정도 사양하는 제스처를 취해야 할 만큼 김춘추에게는 왕위가 과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김춘추는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국왕 후보로 부각되었을까? <삼국사기> 권5 '태종무열왕 본기'에 따르면, 김춘추가 차기 국왕으로 부각된 시점은 알천이 섭정을 거부하고 김춘추를 추천한 때였다. 그러니까 진덕여왕이 사망한 진덕여왕 8년(654) 음력 3월로부터 음력 4월 사이의 어느 시점부터 김춘추의 위상이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이는 김춘추가 후계자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기간이 길어야 1개월밖에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위계승권이 없는 그가 그렇게 급부상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성골이 완전히 끊어져서 새로운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데에다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은 알천마저 섭정 자리를 사양했다는 점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춘추가 18세 풍월주 재임 경력을 통해 이미 리더십을 인정받았다는 점 ▲칠숙의 난 이후 김유신 집안과 함께 김춘추 집안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
▲의자왕·연개소문 정권의 등장 이후 선덕여왕의 권위가 급속히 약화되면서 김춘추-김유신 콤비가 외교·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했다는 점 ▲신라가 국운을 개척하기 위해 외교 방면에서 활로를 모색하던 때에 마침 김춘추가 외교의 귀재로 인정받았다는 점 ▲김춘추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자기 아들들까지도 당나라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갖도록 함으로써 당나라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는 점 등등.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김춘추가 후계자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진덕여왕 사후에 알천이 섭정을 포기하면서부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김춘추는 선덕여왕 시대는 물론이고 진덕여왕 시대에도 왕위계승권자로 부각되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는 왕권을 꿈꾸고 있었을지 몰라도, 폐주 진지왕의 손자라는 낙인이 찍힌 김춘추는 함부로 왕의 꿈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교방면에서 실력을 쌓는 동시에 김유신 가문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한편 당나라를 자기편으로 만들면서 오랫동안 때를 기다리며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는 조조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르며 훗날에 대비했다.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 바로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김춘추는 결코 자신의 재능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도광(韜光)이란 표현이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양회(養晦)는 했다. 어둠 속(불리한 신분)에서 은밀히 힘을 키우면서 성골여자들이 모두 사라질 날을 기다리며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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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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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왕위 등극 걸림돌은 비담 아니라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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