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오른쪽)이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제46회 방송의 날 기념식'에서 엄기영 MBC 사장과 인사를 나눈 뒤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유성호
딱 한번 엄기영 MBC 사장을 실제로 봤다. <대기자 김중배> 출판기념회 때다. 시작보다 앞서 도착한 그는 연신 담배를 물고 있었다. 입가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지나는 대중과 친절하게 눈인사를 나눴다. 내 머릿속 카메라에 찍힌 이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올 2월 26일 기자 50주년을 기념해 책을 낸 김중배 전 MBC 사장은 한나라당이 국회에 기습 상정한 미디어악법을 성토했다. 이 땅에 저널리스트가 있느냐고 개탄했다. 엄 사장도 이에 동참했다.
엄 사장은 "기자인생 50년 가운데 문화방송에 몸담으신 것은 고작 2년에 불과하지만 지금 같은 시대에 김 사장님이 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면서 "시장에, 또는 힘에 의해 방송의 공공성이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안고 있는 과제"라고 말했다.
엄 사장은 "힘이 부칠 때마다 김 사장님의 2년을 기억하면서 스스로 담금질하겠다"고 강조했었다.
김중배와 엄기영그로부터 6개월 뒤 방송문화진흥회에 새로운 이사진이 구성됐다. 소위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대거 포진됐다. 뜨거운 여름, 방문진을 접수한 그들은 MBC에 대한 섭정을 시작했다.
MBC 간판 프로부터 손보려 들었다. <PD수첩> <100분토론> 등이 그것이다. 심지어 김광동 이사는 프로그램 통폐합까지 주문했다. <2580>과 <PD수첩>, <뉴스후>는 성격이 같은 프로그램인데 합쳐도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말도 했었다. 쌍용차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노동자 얘기만 다루지 말고 사측의 입장을 동등하게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입장을 공평하게 다뤄주는 것이 공정보도라고 규정했다. MBC 내부에서는 저널리즘의 기본을 모르는 처사라고 항의가 빗발쳤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방문진 뉴라이트 이사들은 초기부터 엄 사장의 군기를 잡았다. 만성적자 구조의 방만경영 해결과 단협에 명시된 국장책임제, 공정방송협의회 규정 등이 노영방송의 근거라며 개정을 주문했다. <PD수첩> 번역문제와 <100분토론> 시청자의견 문제 등도 조목조목 따졌다.
엄 사장은 2주에 한번씩 방문진으로 불려가 방문진 뉴라이트 이사들에게 비판을 들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엄 사장은 뉴MBC 이노베이션 플랜을 만들고 11월 30일까지 시간을 달라고 했다. 성과를 내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뉴스는 연성화됐고 프로그램은 예전보다 날카롭지 못했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진행자 교체 시비가 붙었고 라디오 피디들이 싸워 김미화씨를 지켜냈다. <100분토론> 폐지론이 고개를 들었지만, 진행자 교체 선에서 마무리 됐다.
이 모든 상황은 엄 사장과 MBC 구성원들에게 모욕이었을 게다. 정상모 이사는 이 같은 방문진의 간섭을 비판하면서 '방문진의 MBC 섭정을 즉각 중단하라'고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엄 사장이 방문진에 의해 한창 휘둘리던 8월, 1차 자진사퇴 대공세가 시작되던 때, MB정권으로부터 먼저 강제해임된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오마이뉴스> 글을 통해 엄 사장에게 공개편지를 보냈다. 핵심은 절대로 스스로 먼저 물러나지 말라는 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