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달린 항아리이런 식의 균열이 있는 도자기를 '가요'라고 하는데 투명한 백색을 선비정신의 지향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요를 구입한 사람들은 성리학에 저항적인 도시인들이었나봅니다. 중인 출신인 김홍도의 그림에는 특히 이런 형태의 가요가 자주 등장합니다.
대북고궁박물관
18세기는 베이비붐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17세기는 한·중·일 3국 모두 왕조의 교체와 전쟁 등으로 국가관리시스템에 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던 때였습니다. 내전 혹은 국가간 전쟁으로 인해 급격하게 줄었던 인구는 18세기, 동아시아에 찾아온 평화와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것은 생산과 소비 모두를 자극, 경제에 활력을 넣었습니다.
경제활동 인구의 증가로 인해 18세기 경제는 활력을 찾았습니다만, 그것은 또한 위기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다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간 것은 인구증가로 인한 경제위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절대적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은 생산방식의 변화, 즉 경제적 관계의 재구성외에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구석기 채집 경제를 신석기 농경의 시대로, 다시 신석기 분산농경을 청동기 협업의 시대로 이행시켜낸 힘이었습니다).
18세기 초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19세기를 목전에 둔 시기, 바로 정조시대에 딱 멈추고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시작한 19세기에 조선의 인구는 급격하게 뒷걸음치기 시작합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 뉴라이트 계열의 연구서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그 연구서는 18세기 조선을 비교사적으로 보아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의 재분배가 이루어진 시대라고 평합니다. 17세기 체제의 위기에 직면한 조선 집권세력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유교적 도덕경제를 펼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법률적 표현이 '대동법'이라는 것이지요.
이에 힘입어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분배경제의 힘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로 이때부터 조선경제는 침체에 빠지는데 그 이유를 이 연구서는 시장경제의 발달을 저해했던 도덕경제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재화의 효율적 재분배를 가져오는 것은 시장경제라는 것은 굳이 이 연구서의 주장이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연구서는 시장경제를 교란하는 물가의 비상식적인 상승이 있을 경우 이것을 상인들의 농단으로 치부하여 정부와 관리들이 간섭함으로써 소농들이 부를 축적하고 상업자본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길을 가로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입니다.
'(이 시대가 주는 교훈은) 숭고한 이념의 정책이 경제의 번영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이전의 경제속에서 시장경제 속에서 성장의 전망을 찾는 경제주체들이 경제의 번영을 가져온다는 점이다.'인구가 정체될만큼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 18세기 도덕경제 때문이라는 이 분석이 왜 씁쓸하게 느껴질까요? 그것은 아마 같은 문제를 바라보는 다른 두 사람의 견해 때문일 것입니다. 한사람은 외국의 동양사학자이고, 다른 한사람은 이시대를 살았던 실학자 성호이익입니다.
동양사학자는 아시아, 특히 중국과 한국의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를 분석하면서 인구증가가 오히려 발전을 저해했던 요인이라고 분석합니다. 인구 증가에 따른 유휴노동력의 증가는 언제든 대체가능한 인력풀을 보여줌으로써 노동력간의 경쟁을 유발, 소작농들이 자기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라도 노동생산성을 극대화시키고 농장주들의 이익을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지요.
거기에다 중앙집권제라고 해도 중앙과 지방사이에는 강제력이 차츰 약해질 수밖에 없는 통치체제가 가세합니다. 지방관리는 구조적으로 농민들에게 세금을 자의적으로 징수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것이지요. 관리의 월급은 작았고, 아전들의 월급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뇌물이 간접세라는 형태로 용인되기도 했고, 그마저도 성에 안찼는지 아예 합법적인 고리대금업인 환곡을 통해 부를 축적합니다.
성호이익은 관리의 월급을 늘이고, 아전들에게 녹봉을 지급함으로써 이 부조리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뇌물의 경계선이 없는 이런 체제하에서는 관리와 아전의 횡포는 도무지 막을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조선은 이런 체제하에서 농장주들에겐 관대하고 농민들에겐 가혹한 세금제도가 농촌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두 사람의 견해입니다.
사실, 뉴라이트계열 사학자의 말에도 진실이 담겨있고, 그것은 매우 중대하기도 합니다. 상업경제로의 이행을 막은 것은 어찌되었든 농업경제에 기반을 둔 조선이라는 국가체제였으니까요. 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상업자본의 발전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풍부한 노동력은 농업이윤을 더욱 높여주었으니 서울의 거상들은 돈이 모이는 족족 지방의 문전옥답을 사들였습니다. 땅은 부의 축재수단이었으니 땅에 돈을 묻은 사람들은 상업경제,화폐경제의 발전을 반길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전근대적 국가형태와 밀착하여 대대손손 번영을 기원합니다.
이들이 19세기를 이끌어간 세도가들로 변질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막아선 그들이 분배에 관심을 쏟았던 도덕경제의 주체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