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빨리 묻어주라고 야단이셔서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했다
김수복
그 시기에 가설극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이른 봄과 농사일이 얼추 끝난 늦가을 그렇게 일 년에 두 차례 와서 면소재지 옆 공터에 천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하는 이동극장이었다. 이때가 되면 마을마다 비상이 걸렸다.
형들은 군용 반도와 자전거 체인으로 은밀하게 무장을 하고, 누나들은 저녁밥을 먹기도 전부터 '구리무'와 동백기름으로 냄새를 피워대며 어른들의 잔소리를 듣는다. 이 집 저 집에서 '썩을년' '미친년' '다리몽뎅이가 성할 줄 아느냐' 등등 소리가 담을 넘는다. 다리야 부러지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누나들은 어둠이 깔린 거리로 하나둘씩 나오고,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던 형들은 그녀들을 호위하며 처음에는 살금살금, 그러다가 차츰 와작와작 웃어가며 가설극장으로 전진한다.
영화는 형이나 누나들만 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꼬맹이들도 역시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가설극장용 영화는 대부분 요새 말로 하자면 십구금 성인물이어서, 형들과 누나들의 전폭적인 지원 내지 공모가 없으면 천막 밖에서 덜덜 떨어가며 소리나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꼬맹이들도 대부분 한 번 정도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영화를 보았거나 안 보았다 해도 본 것 이상으로 실감나게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예 모른다면 보고 싶다 어쩐다 애를 태울 일도 없었을 것을, 감질나게 한 번 보았거나 이야기만 들었던 탓으로 더욱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여배우의 젖가슴이 다 나온 것도 아니고 윗부분만 하얀 찐빵처럼 도드라진 모양을 보았을 뿐인데도 그것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재우, 종환이, 등 서넛이 작전을 짜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도롱뇽 알이었다. 말하자면 형들에게 도롱뇽 알을 미리서 뇌물로 바치고 가설극장이 오면 달라붙자는 것이었다.
귀신도 무섭지 않다, 영화만 볼 수 있다면 마을 뒤 '건네산'을 넘으면 오벵이골이 나오고, 이 오벵이골에 딸린 여러 개의 작은 골짜기 가운데 하나로 애장골이 있었다. 물동이 같은 옹기그릇이 무수하게 엎어진 채로 쌓여있는 이 애장골은 말 그대로 죽은 아이를 장사지내는 곳이었는데, 그 아래쪽으로 습지가 있어서 여기에 도롱뇽이 많았다. 여기서 건진 도롱뇽 알을 만약에 누군가 우리더러 먹으라 하면 죽인다 해도 입을 열지 않았겠지만, 용도가 형들에게 뇌물로 바칠 것이고 보면 뭐 어쩌랴 하는 생각으로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우리는 사실 그때까지도 도롱뇽 알을 한 번이라도 먹어보기는커녕 징그러워서 손에 닿는 것도 싫어했었다 게다가 애장골은, 아이 귀신들이 덤벼든다 해서 평소에는 오뱅이골로 수영을 하러 가면서도 애장골은 가능한 한 안 보려고 애를 쓰곤 했었다.
그런데 그날은, 영화를 본다는, 볼 수 있다는 오직 그 하나의 생각이 모든 두려움과 떨림과 금기를 깨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정신없이 도롱뇽 알을 주워올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좋게 바쳐서 건져온 도롱뇽 알을 소중하게 밥그릇에 담아서 살강 밑에 감춰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긴장을 한 탓인지, 도롱뇽을 잡느라 피곤했던 것인지 그날따라 늦잠을 잤다.
"안 일어날래. 얼른 나와서 불 좀 때야."소리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사고가 터졌다.
"아이고매, 아이고매 이것이 믓이다냐."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뒤로 벌렁, 문자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뒤로 넘어짐과 동시에 손에 들렸던 밥그릇이 아궁이에까지 날아와서 박살이 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도롱뇽 알들은 마치 깨진 묵사발처럼 흙바닥으로 좍 흩어져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침부터 어머니에게 "호랭이나 물어갈, 호랭이나 물어갈" 소리를 열 번도 넘게 들어야 했다.
좋은 것만 기억하시는 어머니의 기억 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