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 속 비담.
MBC
하지만 중국을 상국으로 받드는 나라의 군주라 하여 폐하라 불릴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역대 한국왕조 중에서 사대주의가 가장 심했다는 평가를 받는 조선왕조의 사례에서도 잘 나타난다. 일례로, 세조 9년(1464) 7월 14일자 <세조실록>에는, 일본 무로마치막부 제8대 쇼군(실질적 통치자)인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조선에 보낸 서한에서 세조가 '폐하'라 불린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고 있었지만, 그 같은 조선-명 관계는 조선-일본 관계와는 무관한 것이었으므로 일본정부로서는 조선국왕을 폐하라 부르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
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교린관계였으므로, 일본 쇼군이 조선국왕을 폐하라 불렀다면 조선국왕 역시 일본 쇼군에게 상응하는 예우를 갖췄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이 일본을 황제국으로 불렀다는 <성종실록>의 기사 등을 볼 때에 그런 판단이 도출된다. 참고로, 당시 조선과 중국 등에서는 일왕(소위 천황) 대신에 쇼군을 최고 통치자로 승인했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폐하 소리를 듣고 또 그런 사례를 왕조실록에까지 기록하는 동안에 명나라는 이를 막지 않고 뭐했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조선측이 황제에게나 붙일 수 있는 조(祖)나 종(宗) 같은 묘호를 죽은 왕에게 붙이는데도 중국측이 이를 묵인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동아시아 전통시대에 국가 간의 사대(事大)라는 게 그저 형식에 불과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조선에게 실질적 굴복을 강요할 만큼 중국의 힘이 그리 강력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명나라는 여진족을 상대로 한 '대테러전쟁'에서 조선 군대의 힘을 빌려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조나 종 같은 황제의 묘호를 사용하는 것을 그저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 뒤의 청나라 역시 막상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선의 협력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이 사용하는 황제의 묘호를 그냥 모른 체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폐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한·중 간 사대라는 게 그처럼 형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아닌 왕의 경우에도 폐하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구미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점은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14년 전인 1883년에 조선과 대영제국이 체결한 한영수호통상조약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조약에서는 영국 여왕(당시 빅토리아 여왕)을 '대영제국 및 아일랜드의 여왕 폐하, 인도의 여제(女帝)'(Her Majesty the Queen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Empress of India)로, 조선 국왕(당시 고종)을 '조선 국왕 폐하'(His Majesty the King of Corea)로 불렀다. 이는 '왕' 혹은 '여왕'이란 표현과 '폐하'란 표현이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전하', <삼국유사>는 '폐하'이러한 사례들은 황제 이외에 대왕 혹은 왕이란 명칭을 가진 군주들도 얼마든지 폐하라 불릴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황제 명칭을 갖지 않은 신라의 왕들 역시 그렇게 불릴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도 그러했을까? 신라의 왕들은 과연 폐하라 불렸을까?
그런데 이 점과 관련하여 각 사료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신라 국왕에 대한 경칭으로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전하'를,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폐하'를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삼국사기> 권45 '김후직 열전'에는 병부령 김후직이 진평왕을 '전하'라 부르는 장면이 나오고, <삼국유사> 권2 '만파식적' 기사에서는 일관(日官) 김춘질이 신문왕을 '폐하'라 부르는 모습이 나온다.
한편,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폐하'가 사용되었다. <화랑세기> 제6세 풍월주 세종 편에는 미실이 진흥왕을 '폐하'라 부르는 광경이 나온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이 같은 <화랑세기>의 기록에 의거하여 '폐하'를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의 기록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사료상의 기록만 갖고는 신라에서 어떤 표현이 사용되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단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발견된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군주의 연대기)와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을 보면,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년)의 후임자인 제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년) 때까지는 신라가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진덕여왕이 선포한 신라의 마지막 연호는 태화(太和)였다. <삼국사기> 권5 '진덕여왕 본기'에 따르면, 진덕여왕 원년(647) 7월에 태화란 연호가 선포되었다고 한다. 진덕여왕의 후임자인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재위 654~661년) 때부터는 독자적 연호가 선포되지 않았다.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현상은 후삼국시대를 제외하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진덕여왕 때까지는 '폐하'라 불렀을 가능성 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