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성호 이익은 안산에 평생을 머물면서 스스로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기념하여 기념관이 설립되었습니다.
이익의 집안인 여주이씨 가문은 한양 소정동에 ‘이씨 집안 서재’라고 알려진 유명한 서재가 있었는데요, 이곳에는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책들이 많아 성호 이익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고, 형인 옥동 이서는 이 서재에서 본 중국 왕휘지의 책을 통해 서예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동국진체라는 서예법을 탄생시키기도 합니다.이 서재는 후에 정조시대 최고의 천재였던 이가환을 낳았고, 그의 제자인 정약용도 이 서재를 통해 성리학이외의 학문을 접하기도 합니다
성호기념관
<흥부놀부전>에서는 여기서 제비가 등장하였습니다. 비현실적인 세계를 도입해야만 했던 것은 답을 몰랐기 때문이었겠지요. 이 처참한 상황을 똑바로 보았던 사람들이 바로 실학자입니다.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중농학파' 실학자들은 모든 생산력의 기반인 농촌과 농업 파괴가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통적으로 농민에게서 유일한 생산수단인 '토지'를 빼앗을 수 없게 되는 '정전법'을 주장합니다.
유형원은 중국과 조선의 역사를 연구하여 부가 집중되었던 나라는 멸망했으며 반대로 빈부격차가 작았던 나라들은 부강했다는 것을 실증하여 <반계수록>에 담았습니다. 이익은 <성호사설>속에서 자연재해는 인간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주어진 자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농민들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그의 생각은 과학기술을 장려하는 '성호학파'를 낳았습니다.
성호학파의 영향 아래 청소년기를 보낸 정약용은 지방수령으로 부임해 간 뒤 농촌의 파괴적인 현실을 보고 극단적인 '집단공동체'인 여전을 꿈꾸기도 합니다. 그가 말한 '여전'은 공동노동과 평등한 분배, 정치의 민주주의를 주장하였기에 공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은 조선후기 농촌사회가 이미 완벽하게 파괴되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한반도에 인류가 들어와 살았던 그 어떤 때보다 더 많은 부자들이 탄생한 것도 바로 이 18세기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배경은 왕실에겐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는 그렇게 찾아옵니다.
현실 속 흥부의 뒷이야기는 어땠을까?흥부의 뒷이야기는 이렇지 않았을까요?
도무지 일거리를 찾지 못한 흥부는 결국 가족들에게 '해산'을 명령합니다.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데리고 떠나고 머슴살이라도 할만한 아이들은 제갈길을 찾아 가도록 합니다. 아이들 중 일부는 머슴을 살러 가고, 일부는 도둑이 되었습니다.
흥부는 남겨진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한양은 이미 수십만 명의 거지와 유랑민들로 만원이었습니다. 청계천 다리 밑은 몇 개의 조직이 점령한 상태라 꿈도 꾸지 못한 채 동대문 밖 움막 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비위생적이고 인구가 밀집된 도시의 형성이 치명적인 전염병을 탄생시킨 것은 오래된 일입니다. 콜레라를 비롯한 전염병의 역사는 그래서 도시의 빈민가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홍역에 대해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은 임진왜란 이후의 질병이라고 정의를 했던 것도 그래서입니다. 전쟁 이후 빈민가는 급속하게 확대되었고, 18세기에 이르면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겹치면서 그 어떤 시대에도 겪어보지 못한 전염병의 시대가 찾아옵니다. 콜레라, 홍역, 천연두가 휩쓸고 지나가는 우울한 조선의 18세기에 그 이유가 빈부격차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달라졌을까요?
뉴라이트 계열의 한 연구자의 연구에 따르면 18세기는 정치적 안정기였고, 생산력도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인구증가가 거의 멈춰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흥부의 가족들 중 몇몇은 이 질병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인 날이면 흥부는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관청의 아전들은 시체를 치우고 묻는 일에 필요한 일용직 노동자를 임시로 뽑아갔거든요.
겨울에도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때가 있는데, 유난히 추위가 기승을 부린 날이면 굶어죽고 얼어 죽은 시체를 치울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겼습니다. 언젠가 흥부도 그런 아르바이트들의 손에 묻힐 날이 오겠지요.
흥부의 자식 중에 운이 좋아 상인의 심부름을 하다가 보부상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짧고 아쉬운 삶을 마감합니다.
그동안 놀부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자신의 행운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생각할 만큼의 지혜가 없는 그로서는 그저 '자신의 탁월한 이재능력'에 대해 만족해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