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백자 쌍용무늬 납작병원나라 징더전가마에서 만들어진 청화백자로 100억 원을 넘어가는 용무늬 청화백자와 거의 동일한 양식입니다. 당시 도자기로서 거의 새로운 기술이랄 수 있는 청화백자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도자기입니다.
일본 출광 미술관
청화백자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외국에서 더욱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푸른 빛 청동기에 대한 전통이 없었고, 우유를 마셨습니다. 그러니 백자를 보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끌렸습니다.
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왕국에선 종교계율에 따라 도자기에 사람이나 동물을 그려 넣지 않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코란의 가르침 때문에 그들은 페르시아 양탄자처럼 아무 의미 없는 문양이 반복되는 그림을 원했습니다. 이슬람왕국의 귀족들은 포도덩쿨무늬인 당초무늬를 화려하게 수놓은 백자를 주문했습니다. 그들은 이 도자기를 자랑하기 위해 손님을 기다란 탁자에 초대하여 접대하는 코스요리를 개발하였다고 합니다. 그들 때문에 아라비아 상인들은 쉴 새 없이 중국에 백자를 사러 드나들었습니다.
유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럽의 귀족도 백자를 사기 위해 재산을 쏟아 부었습니다.그것은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만들어졌을 때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명나라의 '청화백자'는 전 세계 귀족과 왕족들의 필수품이었으며 무역은 중국 황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습니다. 경덕진은 보호 아래 발전하며 수많은 청화백자를 쏟아내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유럽에서 청자가 동양에서만큼 인기를 끌지 못한 까닭을 청동기문명을 갖지 못한 데서 찾기도 합니다. 유럽문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문명은 철기문명을 가진 정복자에 의해 신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건너뛰었습니다. 철기문명은 대륙을 끝없는 정복전쟁의 시대로 끌고 들어갔고, 또한 해상문명의 시대를 열기도 했습니다. 철기문명 최대의 발명품은 무기가 아니라 '쇠도끼'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에 관한 나무꾼의 선택에 관한 전설은 이때 시작되었을 거라고 여겨지는데요, 그것은 금과 은은 단지 그 무게에 상응하는 가치만 있을 뿐이지만, 쇠도끼 한 자루만 있으면 그것은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었던 시대인 철기시대였기 때문입니다.)조선초에 청화백자가 나타나지 않은 사연우리나라도 그 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몰래 청화백자를 사들였다 붙들려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돈깨나 있고 힘깨나 있는 사람들은 청화백자를 탐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청화백자는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태조부터 태종을 거쳐 세종시대에 이르러 나라가 안정이 되자 부자들이 생겼는데도 말입니다. 도자기의 세계화라는 흐름에 뒤쳐진 것일까요?
그런데 세종시대 도자기 산업은 꽤 번성했습니다. 임금은 분청사기 기술개발을 위해 노력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청화백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지요. 세종은 청화백자가 가진 의미를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청화백자는 서민이 쓰기엔 너무 고급스러운 도자기였습니다. 아무데나 널린 분청사기 흙과 달리 백자에 쓰는 흙은 귀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흙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실에서 그런 흙을 구하지 못할 리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청화백자를 만들지 않은 것은 꼭 필요한 재료가 수입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라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물건이었죠. 바로 '코발트'입니다.
코발트청화백자가 인기를 끌었던 것은 그곳에 무늬를 넣는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눈부시게 하얀 백자에 무늬를 만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물감은 굽는 동안 증발해버릴 것이며 상감기법은 백자의 멋을 살리기 어렵습니다. 어설픈 색은 번져서 오히려 칠하지 않은 것만 못했습니다.
코발트는 평소에는 보라색이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구우면 푸른색이 나는 광물입니다. 광물이기 때문에 1300도 넘는 온도까지 견딥니다. 푸른빛이 감도는 새하얀 백자에 짙푸른 코발트로 그림을 그리면 강렬한 느낌이 납니다. 백자의 하얀색을 살리는 데는 그 이상의 방법은 없습니다.
코발트는 유화물감과 같아서 오동기름을 섞으면 붓이 쉽게 잘 나가며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초벌구이한 자기에 붓으로 그림을 그린 뒤 유약을 발라 구우면 그림은 작은 붓 자국까지 전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도자기가 가진 조형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림도 훌륭한 감상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법이 가능한 것이 코발트의 장점입니다. 이 백자를 청화백자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코발트는 우리나라에선 전부 중국에서 수입해 와야 합니다. 중국도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서 수입해오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더욱 귀할 수밖에 없었지요. 어렵게 구한다고 해도 그 값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어서 청화백자 하나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자기였습니다. 그런 청화백자를 개발해야 할 이유를 세종임금은 찾지 못한 것입니다.
중국에서 코발트를 수입하기보다 책을 사왔고 장영실과 같은 능력 있는 젊은이들을 유학시켜 견문을 높이는데 돈을 썼습니다. 그것이 전 세계 유일한 도자기였던 분청사기가 만들어진 힘입니다.
우리 흙으로 그릇을 빚되 질을 높이면 된다는 믿음. 그것이 세종임금의 도자기 철학이었고 그래서 분청사기를 세종임금의 도자기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상감백자의 등장분청사기가 독창적이었던 데는 탄생 당시 국제 정치 상황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고려의 공민왕이 중국의 원나라와 그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세워진 명나라 그 어느 쪽에도 가까이 하지 않는 정책을 쓴데다가 무역마저 끊겼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세워진 뒤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조선의 외교전술은 '사대교린'입니다. 중국에 대해서는 큰 나라로 섬기는 것이고 여진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 전쟁의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정책입니다.
이 정책은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까지 못 박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명나라에는 철마다 사신을 보내며 공물도 함께 실어 보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우리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얻는 것도 많았습니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우리나라가 선물을 보내는 이 사절단에는 상인이 꼭 끼었습니다. 나라와 나라사이의 무역은 물론이고 상인들 간의 무역도 이 참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나라로서는 선진문물을 배우고 들여올 수 있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상류사회에서는 이틈을 타고 슬그머니 청화백자를 찾는 사람들이 늘게 되었습니다. 도자기에도 중국풍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백자는 거침없이 우리나라 도자기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백자사발에 소원을 적었던 것처럼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은 백자에서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류층들은 중국과 무역길이 트이기 전부터 백자를 만들어 썼습니다. 그것이 분청사기와 구분이 거의 안가는 '상감백자'였습니다.
분청사기에는 중국풍이 없습니다만 이 상감백자에 슬슬 중국도자기를 복사한 모양이나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백자가 가지는 숙명이었던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