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노동 현장 집 근처 공장에서 벽돌을 만들고 있는 파키스탄 어린이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어린이 노동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흑인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시기부터 보더라도, 흑인 노예제가 막바지에 이르면 흑인 어린이층이 공급되는 것이 수순이었다. 젊고 싱싱한 노예들의 공급이 모자라면 어린이들이 그 대용품이 되는 것이다. 1811~1867년 대서양을 건너온 전체 노예의 41%가 어린이였다고 한다.
이후 노예무역이 폐지되어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자 무역상들은 그 대용품으로 현지의 빈민층 어린이들을 이용했다. 영국의 경우 본토가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공장과 탄광에서 여성과 어린이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초기 산업시대의 노동집약적인 공장과 농장들은 이제 제3세계로 자리를 옮겼고, 제3세계의 어린이들이 그 일을 맡고 있다. 현대화된 생산과정과 세계화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공고히 한다.
유엔의 아동권리협약은 제 32조에 "경제적인 착취를 비롯해 위험하거나, 교육을 방해하거나, 건강이나 신체적∙지적∙정신적∙도덕적∙사회적 발전에 유해한 모든 노동으로부터 보호 받을 아동의 권리를 인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어린이들이 착취와 억압, 열악한 근무조건 아래서 일하고 있다.
19세기 산업혁명 시대의 영국이나 현대의 파키스탄에서나 어린이들이 직업 일선에 나서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압박 때문이다. 어린이들을 가정에서 분리시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키는 것은 21세기판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린이 노동자 이크발, 희망과 용기의 상징이 되다이크발 마시흐는 어린이 노벨상이라 불리는 '세계어린이상'의 첫 수상자이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희생된 안네 프랑크와 함께 2000년도 공동 수상했다.
파키스탄에는 노예 같은 생활을 하는 어린이들이 7백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 어린이들은 벽돌가마와 카펫공장,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크발은 4살 때 카펫 공장에 팔려가 하루 1루피(우리 돈 25원)를 받고 10시간 이상을 일하는 노동자였다. 거듭되는 착취에 공장을 탈출한 이크발은 학대받는 어린이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 결성된 단체를 찾아간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들의 실상을 고발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후, 이크발은 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어린이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도왔다.
변호사가 되어 힘든 상황에 있는 어린이를 돕겠다는 꿈을 키우며, 이크발은 불법 공장에 숨어 들어 그 공장의 실상을 파헤치거나 직접 연단에 서서 어린이 노동 착취의 실태를 고발하였다. 이크발의 이러한 용기있는 행동이 알려지면서, '리복'사에서 주는 '행동하는 청년상'과 보스턴에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 스웨덴의 국제회의에 가서 미성년자 학대를 고발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활발한 활동을 하던 이크발은 1995년 부활절, 파키스탄의 라호르시 근처의 무리트케라는 마을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범인은 잡지 못했지만 카펫 마피아가 관련되어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13세였다. 이크발은 비록 짧은 삶을 마감했지만, 어린이 노동을 세상에 알린 희망과 용기의 상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