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다닐 길만 빼고 고추를 깔아 놓습니다. 이렇게 해도 어느 누구 투덜대지 않습니다. 모든 골목집마다 이렇게 해 놓지 않으면 자리가 안 나니까요.
최종규
집살림꾼이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보고 씻기고 걸레질하고 설거지하는 모습들은 얼마든지 알뜰히 찍어낼 수 있습니다.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걷거나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이나 자전거 마실 즐기는 사람들 또한 언제나 신나게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헌책방 마실을 하면 한결같이 기쁘고 뿌듯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한편,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처럼 으리으리 커다란 책방에서는 사진 한 장 못 찍으며, 이런 곳에서는 굳이 내가 사진을 찍어야 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추를 못 먹고 고추가루며 고추장 또한 못 먹는 주제에, 골목길 고추 말리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골목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또, 고추를 말리는 자리 둘레로 숱한 꽃그릇이 있고, 빗자루가 있으며, 우리 동네를 두 동강 내려는 산업도로 공사터가 있는 가운데, 골목사람들 손길이 듬뿍 묻은 빨래가 있습니다. 알뜰살뜰 가꾼 골목 텃밭이 있고, 세월이 고스란히 묻은 골목집 바깥벽하고 어울리는 고추들이 있고, 가지런히 줄을 지어 놓은 매무새라든지, 몇 알만 따로 그러모아 말리는 모습이라든지,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을 자아내는 고추 말리기라고 느끼면서 사진을 한 장 두 장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제 머리 위로 여름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느라 고추도 잘 마르고 제 몸도 뜨겁게 잘(?) 달아오릅니다. 몇 시간에 걸쳐 이 동네 저 동네 고추 말리기 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오니 옷과 사진기가 땀으로 흠뻑 젖습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살며시 제 온몸과 사진기로 스며든 고추 내음을 찬물로 말끔히 씻어내고 두 다리를 쭉 뻗습니다. 아기한테 아빠 배에 올라타라고 하면서 함께 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