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발바리 잔치에서. 자전거 이야기를 꾸준히 띄우는, <오마이뉴스> 김대홍 기자님도 이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최종규
(2) 발바리 자전거잔치
다시 전철에 타고 시청역으로 갑니다. 시청역은 전투경찰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계단이며 안쪽이며 바깥쪽이며 길이며 길가며 전투경찰이 여름마실이라도 나온 듯합니다. 이 더위에 참 애먹는다 싶으면서도, 이 젊은 넋들이 이 더위에 왜 이런 데에서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짓을 하도록 시키는 권력자가 있는가 싶어 슬프고, 이 젊은 넋들은 저희들한테 이런 짓을 시켜도 말없이 따라야만 하는가 싶어 슬픕니다.
땀을 쪼옥 빼면서 바지런히 걸어 겨우 발바리 자전거꾼들이 모인 자리에 닿습니다. 고맙게도 아직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식구가 막 닿을 때에는 모두들 떠나려고 할 무렵. 겨우겨우 사람들 사진 몇 장 찍고, 얼굴 아는 분들하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100번째 발바리 잔치를 맞이해서 만들었다는 기념옷을 한 벌 장만합니다.
'오늘 함께 달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우리 식구는 아직 힘들고, 아이가 좀더 자라면, 아빠는 자전거 뒤에 수레를 달고 엄마는 따로 자전거 하나를 달리면서 함께 자전거잔치를 즐길 수 있겠지. 멀리 서울까지 나오지 않아도 인천에서도 즐길 수 있으며, 인천하고 이웃한 수원으로 마실을 가며 즐길 수도 있고. 자전거잔치에 마실을 올 때에는 아예 여러 날 묵을 생각을 하면서 길을 떠날 수 있겠지. 인천에서 서울을 가더라도 42번 국도로만 밋밋하게 달리기보다, 인천 골목골목 차근차근 누비면서 골목여행을 하고, 골목여행을 끝내고 부천으로 접어든 다음에는 부천 상동 호수공원도 한 바퀴 돈 다음, 시흥이며 광명이며 안양이며 거쳐서 과천을 가로질러 서울로 접어들 수 있겠지. 이렇게 서울로 접어들면, 아빠와 엄마가 그동안 단골로 다니던 헌책방을 한 군데씩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책도 보며 다리쉼을 하는 가운데 마음밥을 먹어도 좋고. 돌아오는 길은 파주와 문산을 거쳐 강화와 김포를 돌아 인천 율도를 오른쪽으로 끼고 달려도 즐거울 테고 …….'
오늘날 세상 흐름으로 따지자면 자가용을 몰며 싱싱 달리면 인천에서 부산까지도 대여섯 시간이면 달릴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금세 숙숙 고속도로로만 가로지르면, 우리가 선 이 땅을 느낄 수 없습니다. 시간은 줄이지만 삶은 없습니다. 아니, 시간을 줄인다기보다 우리 깜냥껏 넉넉히 즐길 시간을 쓰지 못하니, 외려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는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오다 나라찌라고 하는 어느 목사는 《지게꾼》이라고 하는 책에서, 맨몸으로 조선으로 넘어와서 전라도 광주부터 한양까지 스물닷새에 걸쳐서 걸어서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이는 이때 '말과 지식으로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이 얼마나 잘못인가' 하고만 생각했지만, 몸소 스물닷새를 두 다리로 걸으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여느 살림집에서 밥과 잠자리를 얻는 동안, 당신 고향나라 일본에는 없거나 잊혀져 가는 사랑과 믿음을 깨닫고는 깊디깊이 이 나라를 아끼고 돌보는 일에 몸바칠 수 있었다고 밝힙니다.
예전에는 서울부터 부산까지 '하루 만에 자전거로 달리기'를 해 보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달려 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좀더 느긋하게 짬을 내지 못한 탓이 있으나, 자전거를 하루이틀 한 해 두 해 더 타고 또 달리면서, '그런 부질없는 짓'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달려 보려고 하면 얼마든지 하루 만에 달릴 수 있다는 셈이 나왔지만, 여러 날에 걸쳐 좀더 느긋하게 우리 땅과 길과 삶터를 느껴야 제대로 된 '자전거 달리기'가 아닌가 하고 깨달았습니다. 인천에서 춘천을 가든, 인천에서 목포를 가든, 인천에서 제주를 가든, 좀더 많은 마을을 샅샅이 누비고 돌고 부대끼면서, 이제까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던 내 이웃이 누구이고 내 곁지기가 누구인가를 받아들일 때가 더 기쁘고 신나고 재미있고 보람있지 않겠느냐고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