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9월 10일 대통령선걸르 100일 앞두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일대에서 환경미화원들과 함께 거리 청소를 하고 있다.
이종호
이 발언에 나타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이 대통령의 인식을 보면 왜 사람들이 그를 '2MB'라고 부르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정말 비정규직 문제가 "정치적 목적을 갖고 하면 안 되"지만 "여야 의원이 정말 근로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하면 된다"고 보는 것일까. '근로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결될 일이면 교회 가서 '근로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면 되지, 무엇하러 머리 싸매고 제도와 법을 만든단 말인가.
그는 또 "(젊어서 비정규직으로 일할 때) 법적으로 어떻게 되느냐를 원하는 게 아니고, 일자리를 유지하고 정규직하고 비슷하게 월급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다"면서 "당시에는 똑같은 일을 하고도 비정규직은 정규직 월급의 40%밖에 안됐다. 지금은 환경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즉, 지금은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비슷한 월급을 받을 만큼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신분 보장보다는 일자리 유지를 더 원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가 청소부로 일했던 60년대 초반과 지금은 환경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직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정규직 월급의 60~80% 정도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청소부로 일했던 그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신분 보장(정규직)이다. 비정규직 보호법을 만든 취지도 그가 좋아하는 '고용(해고)의 유연성'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모든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는 식으로 확대 해석하는, 이른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더구나 그가 일했던 비정규직(청소부)은 대학 시절에 국한된 파트 타임의 한시직이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정규직 청소부와 비슷한 급여'를 받으면서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이지, 급여만 비슷하다면 평생 청소부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자신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굴 껍데기처럼 우리 대가족에게 들러붙은 가난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고 표현했을까 싶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족은 포항 달동네에서 서울 이태원 판자촌으로 이사 왔으나 가난은 떨어질 줄 몰랐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으로 공부해 고려대 상대에 입학했으나 등록금을 댈 일이 막막했다. 그때 어머니가 일한 이태원 시장의 사람들이 그에게 청소부 일자리를 주선해주었다.
"새벽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시장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일이었다. 잘만 하면 등록금은 해결될 듯 싶었다. 만만찮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덤벼들었는데 정말 힘에 부쳤다…(중략)…1학기 등록금만 벌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나는 쓰레기를 치우며 2학년이 되었고 3학년 때에는 학생회장에 출마하기에 이르렀다."(<신화는 없다>)그가 일한 비정규직(청소부)은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한 한시직이지 평생직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성급한 일반화'에 따르면, 월급이 더 많아지고 일자리만 보장된다면 자신은 평생 청소부를 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논리라면 요즘 시급 4~5천원을 받으며 편의점이나 호프집에서 '알바'를 하는 대학생들이 신분 보장(정규직)보다는 월급을 더 많이 받기를 원하는 만큼, 대학 졸업 후에도 평생 '알바' 자리만 제공하면 된다는 논리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는 계속 '알바'(청소)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1965년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현대건설 공채로 입사해 입사 5년 만에 이사가 되고, 입사 12년 만인 1977년에 마침내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이 되어 '샐러리맨의 신화'를 썼다. 그리고 1992년에 27년간의 현대그룹 생활을 마치고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서울시장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중대한 법안이라면 추미애 위원장부터 설득했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