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의 남편인 세종.
MBC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47 '김흠운 열전'에 간략히 언급되어 있는 문노에 관해서는 위작 논란이 있는 현존 <화랑세기>(필사본)가 매우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제8세 풍월주 문노 편이 그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년)의 등극 직전인 538년에 태어나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년)의 재위기인 606년에 사망한 문노는 진평왕 집권 초기인 579~582년에 제8세 풍월주로서 활동한 바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원래 문노에게는 출세길 즉 풍월주의 길을 막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것은 소년 김유신의 콤플렉스와 유사한 것이었다. 부모 쪽에 하자가 있었던 것이다.
<화랑세기> 문노 편에는 그의 어머니에 관한 설이 소개되어 있다. 가야국 문화공주였다는 설, 야국왕(野國王)이 조공한 여자였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야국(野國)의 의미를 두고 한국고대사 연구자 이종욱은 왜국 즉 일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이 같은 여러 가지 설에도 불구하고 문노 자신이 "나의 외가는 가야 출신"이라고 말한 점을 근거로 <화랑세기>에서는 문노의 어머니가 가야국 공주였을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하다. 아버지가 가야계라는 이유로 신분상의 콤플렉스를 가진 김유신과 마찬가지로, 문노는 어머니가 가야계라는 이유로 동일한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김유신과 비교할 때, 문노의 처지는 훨씬 더 안 좋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김유신의 경우에는 아버지 쪽에만 문제가 있었지만, 문노의 경우에는 부모 양쪽에 똑같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야 출신인 어머니 쪽 말고 아버지 쪽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비조부는 제23대 법흥왕(재위 514~540년)의 총애를 받아 537년에 병부령(국방부장관)이 된 인물이었지만, "지소태후가 정권을 잡자 비조부를 내치고 등용하지 않았다"라고 <화랑세기>에 쓰인 것을 볼 때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막후실세로 떠오른 진흥왕(재위 540~576년) 집권 초기에 정계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비조부의 정계은퇴 시점은 문노의 출생시점(538년) 직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가야국 출신인 데다가 출생 직후 아버지마저 정계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어머니 쪽의 출신과 아버지 쪽의 배경이 모두 다 약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문노에게는 부모 양쪽이 출세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태후를 외할머니로 둔 김유신과 비교할 때, 문노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불리한 편이었다.
출신이 한미한 그가 풍월주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진흥왕 재위기인 554년, 555년, 557년에 문노가 백제·고구려 등과의 전쟁에서 공로를 세우고도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한 것은 위와 같이 그의 출신과 배경이 모두 한미했기 때문이다. 출신과 배경이 그러하다 보니 그의 전공을 적극 추천해줄 인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출신과 배경이 그처럼 한미한 인물이 풍월주의 지위에 오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걸어서 하늘까지 가는 기적의 연출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제7세 풍월주 설원랑에 뒤이어 제8세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물론 기본적으로는 문노의 자질이 매우 우수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문노는 검도를 잘하고 기개가 높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검도를 잘했다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기개가 높았다는 것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지 모른다. 이에 관해서는 김유신이 확실한 증언을 해주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김유신은 화랑 문노를 '기개의 으뜸'으로 꼽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출중한 자질을 갖추고도 젊은 시절의 문노는 출세길에 쉽게 들어서지 못했다. 한미한 출신 및 배경에 더해 강직한 성품마저 거기에 한몫 한 듯하다. 성품이 강직해서 그나마 자신을 적극 홍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공로에 대해 신라 조정이 아무런 상을 내리지 않는데도 묵묵히 자기 일만 열심히 한 것을 보면, 그의 성품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실파와 함께 진지왕 폐위 쿠데타에 참여한 문노그런데 그런 문노의 능력에 주목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이끌어준 인물이 있었다. 바로 미실의 남편 세종이었다. 진흥왕 재위기인 561~568년에 제6세 풍월주를 지낸 인물이다. 제7세 풍월주 설원랑의 전임자였다.
평소 문노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세종은 풍월주가 된 후에 문노를 자기편으로 만들 결심을 했다. 그런데 다른 경우 같았으면 아랫사람을 시켜 "나랑 한 번 만나보자"는 전갈을 보냈겠지만, 세종은 그렇게 하지 않고 직접 문노의 집으로 찾아갔다. 유능한 인재를 부하로 삼을 때에 필요한 예법을 갖춘 것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문노를 찾아간 세종은 이렇게 간청했다.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습니다. 청하노니, 나의 형이 되어 나를 도와주십시오."이런 세종의 말이 하도 간절해서, 문노 역시 몸을 굽혀 세종의 수하로 들어갔다고 <화랑세기>는 전하고 있다. 이때에 형성된 두 사람 사이의 주종관계는 평생토록 변함없이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