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가 저녁에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ㄱ방송국 작가가 쪽지 하나를 보내 옵니다. 모두 일곱 가지 물음을 적었는데, "언제부터 자전거만 고집하게 됐나요?" 하는 물음과 "자전거뿐 아니라 일상 생활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말이나 "신발도 고무신을 신으신다구요?" 같은 물음이 껄쩍지근합니다. 같은 물음이라 하여도 "언제부터 자전거를 즐겨타고 있나요?"라든지 "요즈음 사람들처럼 돈벌이에 미친 채 살지는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라든지 "운동신이 아닌 고무신을 신으면 자전거 탈 때에 발이 아프지 않나요?"처럼 물어 보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좀더 깊이 헤아리려는 눈길이요 가슴이었다면 다른 이야기를 물어 보려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아직 자전거를 못 타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자전거를 좋아하게 될까요?"라든지, "남들뿐 아니라 저 스스로도 입으로는 지구자원이 어떠하느니 걱정하는 소리를 하지만, 정작 자가용을 못 버리고 텔레비전 안 버리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든지, "농사짓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구두나 운동화를 안 신고 고무신을 신거나 맨발인데, 우리들은 땅을 잃거나 잊으며 신발이며 옷이며 살림살이며 모두 소비문명으로만 치닫고 있구나 싶은데, 이런 가운데 도시에서 즐겁고 옳게 사는 길이란 있을까요?"라든지 하면서.
저는 자전거를 즐겨타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자전거를 즐겨타기 앞서 즐겨 걸어다니는 사람입니다. 예닐곱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걷고, 인천에서 서울로 또 서울에서 인천으로 걸은 적이 있으며,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늘 걸어다녀야 합니다. 아기를 안고 다니자면 또 걸어야 합니다.
돈이 없으니 자가용을 안 굴리지 않느냐 물으실 분이 있을 텐데,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환경책 내는 출판사를 돕는 데에 쓰거나 조그마한 환경모임 살림에 보태도록 돕는 데에 쓸 테니, 돈이 있어도 자가용을 굴릴 겨를이 없습니다.
제가 동네에서 만나는 이웃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여느 때에 걷기를 즐기는 분들이 자전거를 즐깁니다. 자전거를 즐기는 분들은 즐겨 걷습니다. 그러나, 자가용을 즐기는 분들은 걷지를 않습니다. 걷지를 않으니 자전거를 안 즐깁니다. 어쩌다가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며 '뱃살 뺀다'고 할 뿐인데, 이렇게 '운동한' 다음에는 어김없이 삼겹살에 소주를 걸치거나 튀김닭에 맥주를 걸치시더군요.
우리 살림에 자가용을 굴릴 겨를은 없지만, 굳이 억지를 써서 굴리려고 한다면 굴릴 수야 있습니다. 그런데 자가용을 굴리면 우리한테 무엇이 좋을는지는 아직 하나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사들이는 책을 다리 허리 등짝 팔 안 아프도록 나를 수 있어서? 아기 데리고 먼 나들이를 하기에 힘이 안 들어서?
우리 식구는 빨래하는 기계를 안 쓰고 손으로 빨래를 합니다만, 기계를 쓸 줄 모르기도 하지만(저 혼자) 쓸 줄 알아도 맡기고 싶지 않아요. 내 땀과 내 품과 내 시간과 내 사랑을 담아서 빨래를 하고 싶습니다. 내 모두를 바친 빨래하기로 말끔하게 빨아 놓은 옷을 우리 식구가 함께 입고 싶습니다.
팔이 떨어지건 등짝이 떨어지건 허리가 휘건, 내 마음에 담을 책이기 때문에 내 가방이 실밥이 터지도록 장만해서 용을 쓰며 집으로 나릅니다. 요즈음은 아기를 가슴에 안고 가방을 등에 메고 나릅니다. 아기를 안고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고 돌아오면 온몸은 땀으로 젖습니다. 그래도, 아빠 가슴에서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칠 때 보람은, 맨몸으로 자전거 타고 휘휘 온 동네를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난 다음 느끼는 보람하고는 견줄 수 없습니다.
.. 이 책의 9장에 따르면 이 중학교 학생들은 '누구나 청바지밖에 입지 않았다.' 게다가 '엉덩이에 걸쳐 입는 나팔바지에 닳아서 빛바랜'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또 '그해에 남들과 다르다는 말을 듣고 싶으면 원피스를 입고 교회에 가면 된다. 그것도 다림질한 원피스를.' 획일화된 제복도 없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보장되는 문화 속에서 복제 인간이 만들어진다. 인간은 무서운 존재다 … 중요한 것은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논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치열하게 대결하면서 양쪽이 얼마나 서로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 (133, 146쪽)
제가 고무신을 처음 신은 때는 2003년 겨울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골사람은 누구나 고무신을 신으니, 저도 고무신을 신은 셈인데, 그무렵은 충주 산골자락에서 이오덕 님 글을 갈무리하면서 지냈습니다. 이오덕 님 글과 책은 산더미 같아서 이 원고뭉치와 책덩이를 갈무리하느라 바쁘니 농사일을 거든 적은 얼마 없지만, 시골에서 일하며 지낼 때에 어느 누구도 저한테 "고무신을 신네?" 하고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운동신이나 가죽신 차림으로 논이나 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시골에서 도시로 나와 책방마실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날 때면 모두들 한결같이 "고무신이네? 게다가 깜장고무신? 요새도 깜장고무신을 파나?" 하면서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학교옷을 말끔히 차려입은 중고딩 아이들은 "저 봐, 고무신이야? 깜장고무신!" 하면서 키득거립니다.
오일장이든 칠일장이든, 시골 저잣거리에서는 모두 고무신을 팝니다. 농사짓는 시골 읍이나 면에 있는 신집에서도 고무신을 팝니다. 도시에서도, 제가 사는 동네에서 가까운 화수시장 신집에서도 고무신을 팝니다.
값싸고 질긴 고무신이 좋으면 고무신을 신습니다. 조금 비싸도 여러 해 오래 신는 샌들이 좋으면 샌들을 신습니다. 십만 원을 주고 열 해를 신는다는 가죽신이라면 이런 가죽신을 신어도 될 테지요. 다만, 저는 삼천 원(시골에서는)이나 오천 원(도시에서는)을 치르고 한 해에 한 켤레씩 신는 고무신이 돈을 가장 적게 들이는 신발이라고 느끼며, 제 발바닥도 땅을 좀더 가까이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느낍니다.
.. 할머니가 장황하게 늘어놓는 옛길의 장점에 비해 현대의 도로는 얼마나 밋밋하고 멋이 없는가? 현대인은 빨리 목적을 이루려는 일에만 사로잡혀 과정을 음미하는 일을 잊고 있다. 그러나 옛길을 걷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다 … 할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옛집과 가게들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 마르틴 할머니의 '고향'은 황폐해져 있었다. 그러나 파스칼레는 할머니의 마음의 고향에 한 소녀가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 (270∼273쪽)
《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사는 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책까지 다로 쓰고 읽고 배워야 할 만큼 '자연을 생각하며 자연스레 사는 길'을 잃거나 버렸습니다. 자연을 생각하며 자연스레 사는 길이란, 오늘날 우리들 거의 모두가 잃거나 잊은 일이지만, 조금만 거슬러 생각하면 우리 어버이 또래에, 또 어버이를 낳아 기른 어버이 또래에는 모두 '그와 같이' 살면서 아무도 '생태적으로 사는'이라 하지 않았어요. 더 쓰거나 덜 쓰거나가 아닌 알맞게 쓰며 알맞게 나누며 지냈습니다. 나한테 더 있으니 남한테 더 덜어 줍니다. 나한테 더 없으니 남한테 더 얻습니다. 있을 때 나누고 없을 때 받습니다.
딱히 '느림'을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천천히'를 외치지 않아도 됩니다. 따로 '적게'를 들먹이거나 '가난하게'를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내 마음과 생각과 매무새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 돌아보면서 '나한테는 돈과 집과 땅과 물건이 얼마나 있으면 될까'를 짚어 나가면 됩니다.
예배당에 바지런히 나간다고 믿음이 꼭 깊은 사람이 아니듯, 예배당에 안 나간다고 믿음이 꼭 없는 사람이 아니듯, 사회나 모임에 돈을 많이 바친다고 꼭 나눔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듯, 사회나 모임에 돈 한푼 바치지 못한다고 꼭 나눔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듯, 우리는 우리 길을 알차게 다스리면서 지킬 슬기를 얻으며 스스로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3) 《판타지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는 가슴
심리치료사이기도 하고, 일본 문화청 장관이기도 했던 '가와이 하야오'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2007년에 세상을 떠난 이이는 1928년에 태어났으니 여든 해라는 삶을 꾸려 나간 셈인데, 나라안에 이분 책이 꽤나 많이 옮겨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심리학과 철학을 다룬 책이 옮겨졌고, 한 해 두 해 갈수록 심리학책보다는 '어린이문학을 말하는 책'이 옮겨졌는데, 지난 2008년 9월에는 《울보 하야오》라는 책을 펴내며 당신이 보낸 어린 나날을 수수하게 들려주면서 따스한 아름다움을 베풀어 줍니다.
뭐랄까요, '심리치료는 이렇게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까요. 어쩌면, 가와이 하야오 님 이야기를 담은 《판타지 책을 읽는다》며 《그림책의 힘》이며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며 《어린이 책을 읽는다》며 한결같이 심리치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굳이 심리치료를 한다는 책이라기보다 '살아가는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로 꾸미거나 덧보태지 않으면서 나 스스로 내 삶을 돌아보도록 한달까요. 《어린이 책을 읽는다》나 《판타지 책을 읽는다》나 매한가지인데, '이런저런 책을 읽어야 좋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습니다. 그저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니 내 눈이 트였고 내 마음이 열렸으며 내 생각이 깨쳤다'고 털어놓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나라 지식인들은 '수준이 낮다'며 건드리지 않는 '애들 책이나 읽으'면서 비평을 하는 '한갓진 놀음놀이'나 할 뿐이라 여길는지 모르나, 가와이 하야오 님은, 다른 어느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문학보다도 '어린이책'에서 빛을 보고 느끼고 껴안습니다. 이 빛을 남김없이 받아먹으며, 냠냠짭짭 즐겁게 받아먹은 다음, 기쁘게 이야기 한 자락을 남깁니다.
.. 이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일이다. 뭔가 '유익한 것', 특히 '건강에 유익한 것'이 발견되면 그것이 전체로 퍼져 클론을 제조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남과 똑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유지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과연 진정하게 유지되는 것일까?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인 나 자신이 과연 그런 것에 만족해도 좋을까? … 현대인은 일상생활 속에서 바쁘게 움직일 '시간'은 있어도, 영혼에 관심을 보일 '여유'는 없다 … 충분한 '보호'를 뱓는 존재는 영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법이다 .. (144, 165, 235쪽)
어린이책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읽는 책입니다. 어린이책은 '어린이만' 읽는 책이 아니기에, 어린이책을 어린이한테만 읽히는 사람은 아주 잘못된 일을 하는 셈일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 좋은 마음밥을 내팽개치는 셈입니다. 어린이책을 어른이 찬찬히 훑고 살피면서 아이한테 '가려서 건네지 않는다'면,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부모나 교사) 크게 잘못하는 셈입니다. 다만,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아이 스스로 읽을 책은 스스로 골라야 하는데, 어버이나 교사 된 사람이 먼저 마음이 뭉클하다고 느낀 책을 보여주면서 건넬 수 있습니다.
《판타지 책을 읽는다》는 어린이책 가운데 '판타지를 다룬 책'이면서 여러모로 손꼽히는 책을 하나하나 파헤치면서, 이 책을 쓴 사람이 얼마나 깊은 마음과 생각을 담았는지 들려줍니다. 이 마음과 생각이 아이들한테 얼마나 아름답고 기쁘게 스며드는 마음과 생각으로 다시 태어나는가를 곰곰이 짚고, 이러한 마음과 생각을 아이들만 받아먹게 하기보다는 우리 어른부터 받아먹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 이 세상에서 쉴 새 없이 일하는 어른들의 눈에는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사실 어린이나 노인은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이 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을 해내는 것이다 … 옛날에는 인간보다 훨씬 더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과학의 힘에 밀려나서 잊혀지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이 아닐까? … 교사나 부모 같은 어른들이 어린이를 시험 점수만으로 평가한다면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보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어린이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고 O와 X의 수만 헤아리는 교사가 있다면, 그는 '물감의 하늘색과 진짜 하늘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 (177, 201, 342쪽)
그러면 '판타지 책'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이 판타지라 할 만할까요. 글쓴이 가와이 하야오 님도 책에 밝히지만, 한자말로 해서 '상상'이나 '공상'이나 '환상'이 판타지가 아닙니다. 생각을 넓히고 넓힌다 하여 판타지라 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을 다룬다'고 판타지문학이라 할 수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고양이가 하늘을 날든 사람이 하늘을 날든 판타지문학이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꿈나라를 헤매든 옛날이나 앞날로 날아가서 지낸다고 판타지문학이 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꿈'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이 있기 때문에 꾸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바라게 됩니다. 현실이 없는 판타지란 없습니다. 현실을 떠난 판타지란 있을 수 없습니다. 현실 때문에 판타지를 빚어내고, 현실이 있기에 판타지를 문학으로 일구며 나눕니다.
생각날개라 하면 어울릴까 모르겠고, 생각바다라 하면 어울릴까 모르겠습니다. 생각나무나 생각숲, 생각꽃, 생각하늘, 생각나라, 생각구름, …… 또는 꿈날개, 꿈바다, 꿈나무, 꿈숲, 꿈꽃, 꿈하늘, 꿈나라, 꿈구름, ……을 떠올려 봅니다. 터무니없는 일을 바라는 내 삶이 아니라, 나 스스로 바라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여는 내 삶인 판타지를 떠올려 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누구나 내 삶에 환한 등불이 될 판타지 씨앗을 하나쯤은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못 느껴서 그렇고, 우리가 제대로 안 알아채서 그러하며, 우리가 스스로 안 돌보기에 그렇습니다만, 우리 마음과 몸에 깃든 판타지는 튼튼히 자라날 밑땅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들 삶은 몹시 돈에 매이고 이름값에 얽히고 권력에 끄달리기 때문입니다. 판타지란, 그러니까 참된 판타지란 나 스스로 홀가분해지는 삶을 깨닫도록 하는 이슬떨이입니다. 나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며 아름다움을 찾고 느끼고 누리고 나누자고 하는 길동무입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승이 가르쳐 줄 수 없다. 제자 스스로 체험을 통해 터득하는 수밖에 없다 … '○○장관'이나 '○○부장' 또는 '○○교수' 등은 물론 모두 가짜 이름이다. 그것들은 머지않아 덧없이 사라진다 … 그러나 오랫동안 가짜 이름이 지나치게 강한 힘을 발휘하는 바람에 진짜 이름으로 보내는 인생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생각해 보면, 결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남녀의 진정한 결합이다. 그 점을 잊고 결혼만 하면 '완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이 끊이지 않고, 결국 이혼하게 되는 것이다 .. (287, 318, 328쪽)
가와이 하야오 님은 당신이 태어나 살았던 일본에서 슬기롭고 빛나는 판타지 씨앗이 자라나기를 꿈꾸었고, 고운 선물을 하나 남기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와이 하야오 님이 아니더라도 일본에서는 싱그럽고 애틋한 씨앗 하나 남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쉽게도 우리 나라에서는 우리 스스로 우리 이웃과 우리 아이들한테 고운 씨앗 하나 남기려는 분보다는 큰 돈벌이를 남기려는 분이 많은데, 모쪼록 이러한 책 하나라도 곁에 두면서, 참맛을 알아보고 참멋을 갈고닦을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쁘랴 싶습니다. 판타지 문학은 사랑이며 믿음이며 나눔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2009.06.24 18:38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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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책을 읽는다 - 심리학자가 읽어 주는 판타지 문학
가와이 하야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비룡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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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신고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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