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봄. 경기전에서 영생고 선배들과>라는 글귀가 씌여있는 사진.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핀 걸 보니 딱 요맘때인 것 같다.
시대미술
추억은 오래된 마호가니 책상과 같다. 손때가 곱게 물들어 윤기가 흐르는 마호가니 책상. 그 윤기는 하루아침에 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주 쓰다듬고 닦아줄 때 은근한 손때가 깃들게 된다. 추억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지난 20일 전주 예술회관에서 시작한 '미술인과 경기전'은 경기전에 특별한 추억이 얽힌 미술인들이 펼친 전시회다. 경기전에서 학창시절의 추억을 보냈던 미술인들이 오랜만에 그림을 모았다. 그림의 주제와 소재는 자유다. 연령도 50대가 가장 젊은 축에 속한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신사도 더러 있다. 최고 연장자는 90대.
그러나 그들에겐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경기전'이라는 추억이다. 경기전은 그들의 마음에 이미 오래된 마호가니 책상처럼, 동네어귀의 큰 나무처럼 편하고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를 준비한 '시대미술'의 홍선기 회장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주말이면 그림 깨나 그린다는 학생들 모여"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60~70년대만해도 주말이 되면 경기전에서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이젤 들고, 물감, 스케치북 옆구리에 끼고 왔었죠. 누가 그렇게 하자고 정한 것도 아니었어요. 미술부 학생였던 사람치고 경기전에 오지 않은 학생들은 아마 거의 없었죠. 딱히 미술학원같은 곳도 없던 시절이라 경기전에 모여 선배들로부터 그림그리는 법도 배우고, 인생도 배우면서… 그렇게 놀았어요."
1960년대. 토요일 오후, 학교수업이 끝난 뒤면 그림 깨나 그린다는 전주의 미술부 학생들은 삼삼오오 경기전에 모였다. 까까머리에 교련복을 입고 온 남학생 혹은 감색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 단발머리 여고생은 그곳에 모여 스케치를 하고 물감을 칠했다. 때론 선배들에게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나기도 했다.
"그때는 학생들이 마땅히 만나서 어울릴 만한 장소가 없었죠. 더구다나 미술부 같은 경우에는 주말이 되면 그림연습을 해야하는데 경기전만큼 좋은 곳이 또 없었죠. 사시사철 변하는 풍경도 정말 아름답고요, 경기전과 마주하고 있는 전동성당 그리고 이 주변의 고즈넉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참 좋았죠. 꿈도 많고 열정도 많았던 그 시절, 그것을 표출하기에 참 좋은 곳이었던 것 같아요. 참 넉넉하다고나 할까. 그렇게 예술적인 감성도 키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잘 알려진 대로,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그러나 전주시민에게 경기전은 '그 이상'이다. 역사적인 의미를 넘어 그 곳은 현재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자신만의 추억의 한 장소를 허락했다. 더욱이 한창 꿈 많은 학창시절의 추억이 스며있는 그들에게 경기전은 아주 특별한 '타임캡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