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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북스
어니스트 톰슨 시튼(Ernest Thompson Seton) 님이 쓴 글이 좋아서 이분이 쓴 글을 옮겨낸 책을 하나하나 찾아서 읽습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일본에서 옮겨낸 이분 책이 보이면 그때그때 집어들어 함께 갖추어 놓기도 합니다. 한 번 읽으면서 얻은 좋은 열매를 두 번 읽으면서 새롭게 받아들이고 세 번 읽으면서 거듭 곰삭입니다. 지난날과 오늘날과 앞날까지, 이처럼 훌륭한 자연생태 문학이 우리한테 베풀어져 있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라밖 시튼은 나라밖 목숨과 짐승 삶을 알뜰히 엮어 나갔는데, 나라안에서 우리 둘레 목숨과 짐승 삶, 그리고 자연 삶터를 찬찬히 들려주거나 보여줄 만한 분들은 얼마나 되는가 싶어 안타깝습니다.
.. “어디까지 가지?” “페넬론 폴즈의 펜봉에 있는 농장이요.” “호오, 거긴 이제야 사람이 살기 시작한 숲속 아니냐?” “네, 전 도시보다도 숲이 더 좋아요.” “하하하! 너, 재미있는 아이구나.” “그 숲에선 말이죠, 도시에는 없는 새나 동물을 실컷 볼 수 있어요.” .. (14쪽)생각해 보면, 이제 와서 우리 나름대로 ‘우리 자연 삶터 이야기’를 엮어내거나 ‘우리 자연 삶터 짐승 이야기’를 써내기란 대단히 힘듭니다. 전국 구석구석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시처럼 바뀌고 공기가 나빠지고 냇물과 바닷물이 더러워지고 있는 판에, 무슨 자연 삶터와 짐승들 이야기를 찾아보겠습니까. 어디에서 범과 곰과 이리와 여우 이야기를 찾아내겠습니까.
이 땅에서는 시튼 님이 펼친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거룩한 이야기를, 놀랍고도 훌륭한 이야기를 써낼 밑거름이 없습니다. 틀림없이 없습니다.
다만, 시튼 님이 쓴 글이 왜 어마어마하고 거룩하며 놀랍고도 훌륭한가를 읽어낼 수 있다면, 모자라고 아쉬우나마 우리 깜냥껏 ‘우리 자연 이야기’와 ‘우리 짐승 이야기’를 펼칠 수 있어요.
시튼 님은 캐나다 북부 드넓은 자연에서 너르고 깊은 넋을 받아먹을 수 있었습니다만, 우리들은 우리 땅에서 우리 가까이에 있는 자연을 껴안으면서, 이 나름대로 너르고 깊은 얼을 받아안을 수 있습니다. 도시 골목길에 있는 길고양이와 길개를 보면서(시튼 님은 <뒷골목 고양이>를 쓰기도 했습니다) 사람과 자연과 짐승이 얽힌 고리를 파헤칠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흔히 보는 비둘기와 참새, 그리고 시골에서 언제나 보는 까치와 어치와 까마귀 들 한삶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나 지방도로와 국도에서 차에 치여 죽는 길짐승 한살이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농사꾼을 애먹이는 날다람쥐와 멧돼지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군부대 짬통을 뒤지는 독수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낡은 집 틈새에서 살아가는 바퀴벌레를 좇을 수 있고, 거의 모두 사라졌다고 할 만한 시궁쥐나 새앙쥐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처음에는 혼자서 숲속을 걷는 것이 무서워서 톰의 도끼 소리가 들리지 않는 안쪽으로는 가지 않았지만, 조금씩 숲에 익숙해지자 안쪽으로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소년 시튼의 목적은 숲의 동물들을 죽이는 것보다 동물들을 좀더 잘 알게 되는 것이었다 .. (44쪽)모든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습니다. 시튼 같은 분 곁에는 ‘너르고 깊은 자연’이 있었을 뿐입니다. 시튼 같은 분 곁에 도시만 있었다면, 이분은 틀림없이 도시 이야기를 썼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도시에서 사람한테 짓눌려 있는 자연’이나 ‘도시에서도 사람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자연’이나 ‘도시 한쪽 귀퉁이에서 조용히 웅크리는 자연’을 찾아나섰겠지요. 아니, 시튼 같은 분 눈길에는 이러한 자연이 한결같이 보였을 테며, 언제나처럼 이 자연을 품에 안고 아끼고 보듬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숲속 오두막에서) 혼자 쓸쓸하지 않았어?” “아, 쓸쓸하지는 않았어. 오히려 무서운 건 그 숲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지럽히는 거였지. 그래서 계속 비밀로 해 뒀어.” .. (1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