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받은 동티모르의 역사는 침략과 수탈의 역사다. 딜리 해변에는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만들어진 녹슨 포가 그대로 놓여있다.
조경국
13일 오후, 우리는 산타 크루즈 묘지를 찾고 있었다. 산타 크루즈는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묘지쯤 된다고 로고스리소시스의 전흥수 고문이 설명했지만, 정작 전 고문도 한번도 가보지 않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고 했다.
동티모르 여행 일정도 이제 이틀을 남겨두고 있었다. 조경국 기자와 나는 14일 오후 1시 35분에 딜리공항에서 발리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동티모르를 떠나기 전에 꼭 들르고 싶은 곳은 두 군데였다. 동티모르 국립박물관과 산타 크루즈.
현지인 운전사인 아또이에게 물었지만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동티모르 사람이 국립박물관이 어디 있는지, 국립묘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현지인들이 부르는 이름과 우리가 부른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싶다.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된 것은 1976년. 1991년, 포르투갈 의원단이 동티모르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당시, 400여 년간 동티모르를 지배했던 포르투갈은 국제사회에 동티모르의 독립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인도네시아가 포르투갈 의원단의 방문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의 지배를 확고히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포르투갈로 하여금 동티모르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하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포르투갈의 방문을 계기로 동티모르 내 독립파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외국의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속속 동티모르에 입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방문은 성사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가 포르투갈 의원단과 함께 입국하기로 한 호주 기자의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건은 독립 운동가들의 피난처로 활용되었던 딜리시의 모타엘 교회에서 독립파 청년 고메스가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시작되었다. 포르투갈 의원단의 방문 중지가 발표된 다음날, 인도네시아군이 모타엘 교회를 습격했던 것이다.
고메스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고메스가 죽은 지 두 주일이 되던 날, 동티모르의 관습대로 사람들은 고메스의 묘지에 꽃을 바치려고 모여들었다. 그들은 꽃만 바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함께 계획했다. 약 3500명의 사람들이 묘지에 몰려들었고, 이들은 독립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군대가 이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현장에서 200여 명이 사망했단다. 이 과정에서 어린아이들도 많이 죽었다고 한다. 이후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고, 수백 명이 구속당했다고 한다. 구속당한 이들 중에는 고문으로 사망하기도 했다고. 이들의 유해는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나중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사망자는 273명, 실종자는 255명이었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학살당한 장소에 묘지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산타 크루즈라는 것이다. 그곳은 동티모르 독립운동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그 곳이 보고 싶었다.
현지인도 잘 모르는 학살의 현장, 산타 크루즈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