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자전거세계여행-아르헨티나 2탄]

등록 2008.12.08 11:26수정 2008.12.0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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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13일 ~ 11월 23일 동안 자전거로 아르헨티나를 여행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말]
10월 4일 토요일. 고속도로 갓길 아래의 어느 나무 아래서.

1차선 도로, 20센티미터 내외의 갓길을 달리는 필자가 안타까웠는지 대부분 차들은 경적 한 번 울리지 않고 조나단을 잘도 피해갔다. 중간 정리를 해보자! 기념 촬영만 하고 간 운전자 가족이 2팀, 초대장을 주고 간 가족이 2팀.


먼저 필자를 발견한 후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던 경차 가족 팀. '지금 리오 꾸아르또(Rio Cuarto: 필자가 지나온 대도시)에 자전거 사러 가는 길이에요. 일요일 밤에 돌아올 거니까, 그 때 아니면 그 이후에 오세요.' 친절한 설명과 함께 필자의 명함 뒤에 정말 간단한 주소와 이름까지 적어줬다. 'Hughes km 300, Zorra Ritta' '하하, 이게 뭔가요! 우리 동네는 작아서 제 이름만 물어보면 다 알아요! 네?'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정동(필자가 사는 동네), 박정규' 이렇게 적어 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 이틀 후에 봐요! 네- 감사합니다.' 부웅!

 주소와 이름만 적어주고 간 첫번째 가족팀
주소와 이름만 적어주고 간 첫번째 가족팀박정규

'부우웅~우~우우웅~' 너무나 푸르고도 푸른 하늘, 풀 뜯어먹다 말고 필자를 발견하고 조금 놀란 눈으로 멀뚱히 쳐다보던 누렁이 몸에 얼굴에만 팩을 한 듯한 우스운 모습의 소들, 하늘하늘 흔들리는 나무 그늘의 유혹이 어우러져서일까?

대금이(대금)가 처음 입을 대자마자 낮고 부드러운 음을 노래한다. 그러나 연습만 가능한 실력이기에 차 한잔 마시지도 못할 사이에 '삐-익'하고 분위기를 깨버리는 소리에 혼자 쑥스러워 하는데, 누가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자전거 여행 중인가요? 어디 가세요? 부에노스요- 아, 가는 길에 저희 집이 있어요! 한번 들러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중년의 트럭 운전사 부부 팀은 자신의 집 주소가 적힌 종이를 주고 웃으며 떠나갔다. 트럭 운전사 집이 100km 후, 경차 가족 팀이 200km 후다. 날씨도 좋고 초대도 좋고 이래저래 다 좋구나!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격려해주고 간 트럭 운전사 부부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격려해주고 간 트럭 운전사 부부박정규

 필자를 초대한 두번째 트럭 부부의 트럭
필자를 초대한 두번째 트럭 부부의 트럭박정규

10월5일 일요일.

8시50분 기상. 점심 전에 도착할 생각이었는데 늦게 일어나서 서둘러 숙소를 나왔다. 먼저 전화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인근의 전화 가게로 갔다. '안녕하세요. 어제 만난 한국인 자전거 여행자예요. 지금 아리아스(Arias)구요, 지금 출발해요. 그럼 나중에 봐요-' 가장 중요한 내용만 전달하고 전화를 끊었더니 요금도 가볍게 나왔다. 역시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어! 멀리서 빠른 속도로 뭔가 오고 있다. 오토바이보다는 느리고 조나단보다는 빠른데…. 앗! 설마? '안녕하세요- 혹시 루이스? 네-' 어제랑 완전히 다른 모습에 못 알아봤다. 싸이클을 타고 나타난 루이스! 그의 정체는 라이더! 라이더가 초대를 했으니 자전거로 마중을 나오는구나. 일요일이라 차도 거의 없고 살며시 구름만 흩어져 있는 푸른 하늘을 가르며 출발!

 필자를 마중 나온 루이스
필자를 마중 나온 루이스박정규

 도시가 가까워지자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표지판이!
도시가 가까워지자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표지판이!박정규

90분이면 도착한다더니 3시간이 걸렸다. 사이클 계산법이었나 보다. 도착하자마자 루이스는 아사도를(쇠고기에 소금을 뿌려 숯불에 구운 아르헨티나의 전통요리) 준비한다. 순대 굵기만한 녀석, 닭, 소고기 등이 숯불 위에서 필자를 위해서 식은 땀을 흘리며 수고하고 있다.


오랫동안 아사도를 부지런히 먹어서일까? 루이스의 가슴만큼 나온 볼록한 배가 아사도의 효과(?)를 말해 주는 것 같다. 주방에서는 로사(루이스의 아내)가 한창 채소며 다른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나도 뭔가 준비할게 없을까? 아! 그래 있지! 있어!'    

 아사도를 준비중인 루이스
아사도를 준비중인 루이스박정규

 필자를 위해 수고중인 아사도
필자를 위해 수고중인 아사도박정규

이날을 위해서 고이 간직해두었던…. 처음에 선물 받고 나서 순간, '자전거 여행자가 이런걸 받아도 될까?'하고 '멍-'해졌던 바로 그것! 오늘을 위해서 햇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자전거 멀미를 하면서도 600km 동안 묵묵히 참아주었던 녀석! 오늘 내, 너를 찬란한 태양 아래로 불러내리라! 

 에두아르도가 선물한 포도주는 600km후에야 건배의 영광을 얻었다!
에두아르도가 선물한 포도주는 600km후에야 건배의 영광을 얻었다!박정규

 포도주를 빛으로 인도하고 있는 루이스
포도주를 빛으로 인도하고 있는 루이스박정규

'아! 이게 뭐예요? 저희가 선물하는 옷 이예요- 음…. 싸인 해주세요! 여기다가요!'

포도주 효과일까? 아사도 덕분일까? 루이스 부부는 필자에게 마음에 쏙 드는 노란색 자전거 옷을 선물했다. 그것도 지퍼가 달려서 활짝 개방할 수 있는 스타일. 안 그래도 바람을 막아줄 자전거 옷이 필요했는데, 이렇게 또 채워지는구나. 필자의 부탁에 로사와 루이스는 정성스레 한 글자씩 자신의 이름들을 옷 하단에 적어주었다. 배부를 만큼 아사도를 먹고 침대 위로!

 필자에게 선물할 자전거 옷에 정성스레 사인을 하고 있는 로사
필자에게 선물할 자전거 옷에 정성스레 사인을 하고 있는 로사박정규

낮잠을 맛있게 자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액자와 기념증서가 가득 걸려 있는 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다 뭐예요? 매년 5회(11월-3월) 정도 자전거 대회가 있거든요.' 아르헨티나는 도로에 갓길이 있는 곳이 거의 없어서 자전거 타기는 쉽지 않지만, 매년 도시마다 정기적인 대회를 개최해서 마니아들은 그 때마다 안전하고 즐거운 코스를 함께 한다고 한다.

기념증서에는 대회 참가자 이름, 대회가 열린 도시명, 라이딩 거리, 개최 일 등이 적혀 있을 뿐, '등수' 같은 건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즉, 이런 대회는 '우위를 가리기 위함이 아니라 함께 하기 위함'이 아닐까? 바로 '1등이 없는 모두가 우승하는 대회'가 아닐까?

 각종 대회에 참가한 완주증서들
각종 대회에 참가한 완주증서들박정규

 대회지역, 완주거리 등이 적혀있다.
대회지역, 완주거리 등이 적혀있다.박정규

필자는 자전거 타기 전에는 마라톤 대회를 자주 찾곤 했는데, 대회가 끝나면 으레 듣는 질문이 있다. '몇 등 했어요? 기록이 어떻게 되세요?' 이런 질문은 필자의 기록이 좋을 때라도 가뭄에 콩 나듯이 조금 으쓱하게 해주는 맛은 있어도 왠지 마음이 휑해지는 맛이 더 진하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어떻게 이겨냈나요? 달릴 때 온 몸에 전해오는 두근거림은 어떤 느낌이었죠? 오늘은 초코파이(마라톤 대회 양대 간식 중 하나. 다른 건 바나나.) 드셨어요?' (연습 부족으로 한번은 거의 꼴찌 선두를 하다시피 해서 간식을 하나도 먹지 못한 적이 있었다.)

왜? 이런 질문을 먼저 하는 이는 거의 없을까? 아마, 모 광고의 카피처럼(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훌쩍거리는 코를 팔로 쓰-윽하고 닦을 때부터 시작된 '등수 조기교육'을 머리에 지진이 나도록 엉덩이에 몽둥이 자국이 물들도록 받아서 그런 건 아닐까?

갑자기 중학교 수학 시간이 기억 난다. 가래떡처럼 하얗던 플라스틱(PVC) 파이프로 분명히 고스톱을 친 것도 아니었는데…. 선생님은 점당 한 대씩 계산해서, 쓰리 고에 피박에 흔든 것처럼 필자의 엉덩이를 차아-악! 차아-악!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셨다. 아! 갑자기 슬퍼지는 건 왜일까?

(3탄에 계속됩니다.)  

2008년 10월5일. 아르헨티나 베나도 뚜에르또에서(Venado Tuerto, Santafe)
꿈을 위해 달리는 청년 박정규 올림.

덧붙이는 글 | 박정규 기자는 < 희망을 찾고, 나누며, 만드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 2006년 5월 16일,“희망을 찾아 떠나는 자전거 세계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2009년 5월 16일까지, 몽골여행, 중국종단, 인도여행, 미국횡단, 쿠바일주, 남미일주, 북아프리카 횡단을 계획 중입니다. 2008년 12월 현재는 남미 우루과이를 달리고 있습니다.

* 희망여행 카페: www.kyulang.net
* 희망여행 저서: 대한민국 청년 박정규의 “희망여행”


덧붙이는 글 박정규 기자는 < 희망을 찾고, 나누며, 만드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 2006년 5월 16일,“희망을 찾아 떠나는 자전거 세계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2009년 5월 16일까지, 몽골여행, 중국종단, 인도여행, 미국횡단, 쿠바일주, 남미일주, 북아프리카 횡단을 계획 중입니다. 2008년 12월 현재는 남미 우루과이를 달리고 있습니다.

* 희망여행 카페: www.kyulang.net
* 희망여행 저서: 대한민국 청년 박정규의 “희망여행”
#희망여행 #남미자전거여행 #아르헨티나자전거여행 #아사도 #자전거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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