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아, 최고가 되려는 열정을 버려라!

세상에 이상주의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등록 2008.11.24 09:32수정 2008.11.24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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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집사로 임직하는 지인을 축하하러 갔다가 시간이 조금 일러 교회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길 양편으로 플러터너스 나무가 서 있는 아름다운 길을 따라 걷다가 미션계통의 중학교 정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잠깐 교문 앞에 서서 텅 빈 교정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이 왼편 건물에 가 닿았습니다. 그곳에는 학교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게 크게 제작된 간판이 세워져 있었고, 그 내용은 대강 이런 것이었습니다.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인재 육성을 위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만약 그곳이 기독교 사학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지도 모릅니다. 최고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니까요.

 

글로벌 시대 운운하는 것도 제게는 실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상투적인 문구로 사람의 시선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비싼 돈을 들여 괜한 짓을 한 셈이지요. 


'죽은 글'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상투적인 문구가 바로 그런 것이지요. 예컨대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인재 육성을 위한' 이런 나부랭이 같은 문구 말입니다.

 

그래도 그런 죽은 글은 효율성이 떨어질 뿐, 개인이나 사회에 해를 끼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이런 식의 말은 사정이 다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최고가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얼마 전인가 사립학교법 개정 문제로 나라 안이 한참 시끄러웠지요. 목사님들이 스님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요구했을 때 그들이 방패처럼 내세운 것은 바로 기독교 사학의 건학이념이었습니다. 그 건학이념이라는 것이 설마 이런 것은 아니었을 텐데요.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인재 육성을 위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승자독식이란 말이 있습니다. 1등한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싹쓸이 하는 그런 식이지요. 이렇게 되면 2등도 꼴등이나 다를 바 없으니 최고가 되어야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는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 한 없이 몸을 낮추신 분이셨지요. 그러니 제대로 된 기독교 사학이라면 간판에 이런 문구를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이들아, 최고가 되려는 열정을 버려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승자독식의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여 거기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 다른 하나는 그런 비정하고 잘못된 방식을 뜯어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많아야 세상은 희망이 있겠지요. 또한 우리의 교육이 희망이 보이는 언덕을 향해 서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더욱이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고자 하는 아름다운 인간 육성을 꿈꾸는 기독교 사학이라면 더욱.


혹자는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저를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나 아니면 망상주의자로 여길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편지글을 읽다보면 생각이 달라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약 한 달 전에 군에 입대한 사랑하는 조카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입니다.    


'(…)좀 창피한 얘기지만 난 군인으로서 정신력이 부족했던지 10kg 완전군장 구보에서 낙오병이 될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단다. 다행히 다른 대원들과 함께 무사히 부대에 들어오긴 했지만 구보에 대한 공포감이랄까 하는 것이 생기기도 했었지.

 

다행히도(?) 나보다 더 구보를 못하는 훈련동기생이 한 명 있었단다. 나는 일부러 그의 곁에서 뛰곤 했었지. 내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주제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낙오병이 되지 않도록 그를 도와주고 싶었던 거지. 구보가 끝난 뒤에 동기생은 나에게 고맙다고 했지만 사실 고마운 것은 바로 나였단다. 그를 걱정하고 응원하면서 뛰다보니 낙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도 그 때 일을 떠올리면 뭔가 중요한 삶의 철학이랄까 이치 같은 것을 깨닫기도 한단다. 내가 약할수록 나보다 더 약한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고 그를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도록 노력하다 보면 어느덧 내 자신의 문제는 거뜬히 해결되고 만다는 거(…)'


세상에 이상주의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이상을 품고 살아도 결코 손해 보는 법이 없는.  

2008.11.24 09:32ⓒ 2008 OhmyNews
#기독교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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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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