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잘린 나무 앞 헌책방나무가 나무답게 자랄 수 없는 이 나라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가지치기가 되는 사회가 아니냐 싶습니다. 그래도, 그런 가지 잘린 나무 앞 헌책방은 오늘도 반가운 책손 하나 기다립니다.
최종규
혜화동에 한 곳 남아 있는 헌책방 '혜성서점'에는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거나 두 다리로 골목길을 거닐며 찾아갑니다. 혼자 찾아갈 때는 으레 자전거를 타고, 두엇이 찾아갈 때는 걸어서 찾아갑니다. 명륜동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 책방인 <풀무질>에 들러서, 미리 전화를 걸어 주문한 책을 사면서 요사이 나온 책을 구경한 다음에 찾아가기도 하며, 혜화동 골목 안쪽에 자리한 또다른 인문사회과학 책방 '이음책방'에 들러 두툼한 사진책 몇 권을 고른 다음 찾아가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삼선교에 있던 헌책방 '삼선서림'까지 함께 나들이를 했으나 삼선교 헌책방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자전거로 찾아온 날이며, '혜성서점'에서 고른 책이 그리 많지 않으면 성신여대역 둘레까지 달려서 '그린북스'며 '이오서점'이며 '간판없는 헌책방'을 둘러보곤 했는데, '그린북스'와 '이오서점'은 문을 닫았습니다. '간판없는 헌책방' 하나만 남았는데, 이곳은 용문중고등학교 가는 길목으로 자리를 옮기며 '신광헌책'이란 간판을 처음으로 올렸습니다.
'신광헌책'에 들른 뒤에도 가방이 덜 찼다면, 헉헉거리며 고가도로를 넘어서 길음동으로 넘어가서 '문화서점'까지 찾아갑니다. 예전에 미아리 둘레에 헌책방이 무척 많아서 여기에도 가고 저기에도 갔으나, 지금 미아리 둘레에는 헌책방 두 곳만 남아서 고이 자리를 지킵니다. 헌책방이라는 곳은 아파트가 아닌 골목길하고 어울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헌책방이라는 데는 빠르기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넉넉한 마음품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따뜻한 마음을 바랄 때 헌책방이 동네방네 문을 열게 되지만, 세상이 더 빠르고 더 높고 더 비싼 구름 위를 바랄 때 헌책방은 돈벌이와 매출에 붙잡혀서 인터넷매장으로만 바뀌면서 하나둘 사라지게 됩니다.
헌책방도 인터넷으로 하는 곳이 퍽 늘고, ‘인터넷 헌책방은 나날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인터넷이란 도움이 되고 쓸모가 있습니다. 섬마을이라든지 산골짜기 마을에서는 인터넷 헌책방이 크게 도움이 되고 이바지를 합니다. 그러나 부쩍부쩍 늘어나는 인터넷 헌책방에서 책을 사는 사람은 섬마을이나 외딴 시골마을 사람이 아닙니다. 어느 인터넷 헌책방에서도 비슷한데, 90∼95퍼센트를 서울·경기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책을 삽니다. 이 가운데 서울 강남 독자가 가장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두 다리로 걸어 보아야 30분이면 넉넉한 곳에 헌책방이 있는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전철로 가면 1시간 거리에 헌책방이 수십 군데, 아니 백 군데가 넘는 서울과 경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몸소 다리품을 팔며’ 헌책방 나들이를 하는 일이란 자꾸 줄어듭니다. 처음부터 인터넷으로만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헌책방 맛이 어떠한 줄 모르고, 헌책방 느낌이 어떠한지 받아들이지 못하며, 헌책방 냄새가 어떠한가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값싼 책, 좀더 적은 돈을 치르며 장만할 책에만 눈길을 돌리고 맙니다.
헌책방은 새책방과 견주어 ‘요즈음 나도는 책은 반값이나 2/3 값, 운이 닿으면 1/3이나 1/4 값으로 살 수 있어서 주머니 짐을 덜 수 있는’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헌책방은 책을 값싸게 사도록 해 주는 곳만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값싸게 사는 맛에 헌책방에 간다지만, 한 번 두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을 거듭하는 동안, 헌책방에 깃드는 책과 헌책방에서 팔려나가는 책에 서려 있는 얼과 넋이 무엇인가를 고즈넉하게 받아먹게 됩니다. 헌책방 일꾼들 두툼하고 시커먼 손을 보면서, 사람들이 마구 다뤄서 많이 다친 책들이 헌책방에서 어떻게 손질이 되어서 되살아나는가를 지켜보면서, 더 높은 값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제 임자를 만났을 때 알맞는 값보다 조금 낮게 치러 주어도 된다’는 말을 하면서 ‘아무쪼록 잘 읽어 주면 나(헌책방 일꾼)도 좋지 않느냐’면서 웃는 모습을 숱하게 보는 동안, 헌책방이 새책방하고 다른 자리임을, 또 우리 나라에서 헌책방이란 어떤 몫을 맡아 왔는가를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새기게 됩니다. 지식이 아닌 가슴으로 얻게 됩니다.
이리하여, 헌책방 나들이를 두 다리로 걸어서 즐기지 못한다고 한다면, 또는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해 보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대중교통을 타고 느긋하게 오가지 못한다면, 책 하나에 스며 있는 우주를 못 보기 일쑤입니다. 시간을 아껴서 빨리빨리 찾아보려고 하는 책에서는, 남보다 빠르게 정보를 얻기는 할 테지만, 이 정보 하나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를 곱씹는 마음결까지는 얻지 못합니다. 여러 인터넷 헌책방 책값을 견주는 검색기에서 더 싸게 매겨진 책을 살피느라 시간을 보내어 돈 천 원이나 이천 원을 아끼게 된다면 주머니가 홀가분해질는지 모르지만, 그처럼 아낀 돈 천 원이나 이천 원을 자기 스스로 얼마나 알뜰하게 쓰느냐를 돌아본다면, 우리가 아낄 대목은 무엇이고 우리가 쓸 대목은 무엇인가를 놓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