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 스크린을 통해 컨베이어 벨트 속도를 올리라고 지시하는 자본가
앞의 두 시간에 가까운 스토리가 바로 이 장면을 위한 리허설인 것처럼 찰리 채플린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연기 아닌 연기를 했다. 이 연설 장면에 대한 채플린의 애착은 대단했다.
제작 당시 주변 사람들이 이런 긴 연설을 삽입한다면 흥행 수입이 100만달러는 줄어들 것이라고 만류하자, 채플린은 "비록 500만달러가 줄어든다고 해도 난 꼭 그 연설을 삽입시킬 거야"라고 응수했다.
<위대한 독재자>를 본 당시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이 영화가 독일의 나치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판하는 것이라는 판단 하에 부하들을 동원해 찰리 채플린의 모든 것을 캐내기 시작했다. FBI가 작성한 채플린 파일은 19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알려져 있다.
<위대한 독재자>를 만든 지 7년 후, 그는 <무슈 베르두(1947)>라는 또 하나의 문제작을 내놓는다. 실업자가 된 전직 은행원 베르두 역을 맡은 채플린은 중년의 돈 많은 여자를 유혹해서 재산을 강탈하고 살해하려는 베르두를 통해 이전의 영화들보다 훨씬 강도를 높여 자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들이 조직적으로 극장을 압박해서 <무슈 베르두>는 많은 지역에서 개봉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는 이제 보수우익세력에게 반미주의자·공산주의자로 완전히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결국 찰리 채플린은 비이성적 반공주의가 판을 쳤던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1952년에 자의반 타의반 미국을 떠나 스위스에 거주하게 된다.
그가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은 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채플린은 1889년 런던 뮤직홀 삼류 배우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그가 한살 때 이미 헤어졌으며, 그와 이복형 시드니는 배우였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된다.
채플린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했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연극무대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그와 형을 키웠다. 그러나 어머니가 점차 인기가 하락하고 건강이 악화되자, 집안은 급속히 기울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정신병 증세는 날로 심해져서 결국 그는 형과 함께 먹을 것을 구하러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이러한 채플린의 어린 시절은 그의 시선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정시키게 했고, 설사 자신이 어려움을 겪더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마음속에 심어주었다.
FBI의 채플린 파일... 고향 잃은 천재그러나 채플린이 런던을 떠나 수십 년간 살아온 미국은 그의 '가치'를 용인할 수 없었고 그는 정든 제2의 고향 미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무리 천재적인 배우이자 감독이라도 그의 인생 자체를 비극에서 희극으로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2년 미국을 떠난 지 20년도 더 지난 1972년에서야 채플린은 83살의 나이로 20년 만에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하기 위해 미국땅을 밟았다. 그리고 5년 후 1977년 12월 25일, 비극과 희극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한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