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냉면물냉면 한 그릇을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다 먹고 나자 폭염주의보는 물론 이 세상 온갖 걱정까지 깡그리 사라지는 듯하다
이종찬
얼음물 위 둥둥 떠다니는 빙하처럼 불쑥 솟은 면발"저희들은 누가 뭐라 해도 옛날 아버지께서 하던 방식 그대로 해요. 저희 집 면발이 다른 집보다 조금 더 굵은 것은 분창(면발 나오는 곳)을 따로 만들기 때문이지요. 물냉면에 쓰이는 맛국물도 영하 30도 이하로 꽁꽁 얼려 놓았다가 물냉면을 손님상에 낼 즈음 얼음이 동동 뜰 정도로 살짝 녹여서 쓰지요."소주 두어 잔 입에 털어 넣으며 이런저런 세상살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쇠고기 수육과 빈대떡이 나온다. 얄팍한 수육 위에는 가늘고 길게 썬 생파가 올려져 있다. 뜨거운 맛국물을 부은 수육에선 실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소주 한 잔 다시 입에 털어 넣고 한 점 집어먹는 수육의 쫀득하고도 고소하게 감기는 맛이 자꾸만 젓가락을 붙든다.
바삭바삭 과자처럼 바스락거리는 빈대떡 맛도 고소하기 그지없다. 이윽고 이 집이 자랑하는 평양식 물냉면이 식탁 위에 올라온다. 달걀 반쪽, 고기 한 점, 얇게 썬 배와 무, 채 썬 오이가 얼음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빙하처럼 불쑥 솟은 면발을 예쁘게 감싸고 있다. 40여 년 손맛이 새로운 예술품으로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젓가락을 붓으로, 고명과 면발을 물감으로, 맛국물을 도화지로 삼아 물냉면이라는 그림을 천천히 그리기 시작한다. 잠시 뒤 물냉면이란 그림이 맛깔스럽게 완성된다. 멋들어지게 그려진 물냉면을 한 수저 입에 물자 쫄깃쫄깃 부드럽게 씹히며 톡톡 끊어지는 향긋하고도 깔끔한 깊은 맛에 혀가 깜짝 놀라 마구 허둥대기 시작한다.
여름철 보양식이 따로 없다"메밀국수는 무를 곁들여 먹어야 독성도 사라지고 소화가 잘 된다니깐. 그나저나 이 집 물냉면 맛도 맛이지만 양 또한 엄청나구먼. 다른 집 물냉면의 1.5배 정도는 되겠어. 마누라하고 같이 와서 한 그릇 시켜놓고 서로 이마를 맞대고 사이좋게 나눠 먹다 보면 없던 사랑도 다시 싹트겠어." - 이승철(시인) 부드러우면서도 감칠맛이 맴도는 면발을 후루룩 후루룩 눈 깜짝할 사이에 다 건져 먹고, 얼음조각이 동동 떠다니는 맛국물을 다시 후루룩 들이킨다. 아, 상쾌하고도 깨끗한 깊은 맛! 시원하고도 기막히게 다가오는 감칠맛! 온몸에 메밀꽃이 하얗게 피어나 산들바람을 쏴아아 일으키는 것만 같다.
세상에. 평양식 '닝닝한' 물냉면 한 그릇이 이렇게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니. 평양식 '밍숭맹숭'한 물냉면 한 그릇이 무더위에 지쳐 맥 빠진 사람을 이렇게 기운이 펄펄 나게 할 수 있다니. 물냉면 한 그릇을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다 먹고 나자 폭염주의보는 물론 이 세상 온갖 걱정까지 깡그리 사라지는 듯하다.
박용수 선생은 "여름철 보양식이 따로 없다, 이 집 물냉면 한 그릇 먹고 나면 허한 속까지 든든해진다"고 말한다. 박 선생은 "메밀은 뜨거운 기를 서늘하게 안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때문에 정서적으로 쉽게 흥분을 잘하는 태양인이나 소양인 등 '양인'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음식"이라고 덧붙였다.
뜨겁다. 마치 불을 떼고 있는 가마솥 안에 앉아 있는 것처럼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요즈음, 무더위를 피해 산과 계곡 바다를 찾는 것도 한 방편이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건강을 챙기는 것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 그래. 오늘은 평양식 물냉면 한 그릇으로 무더위도 사냥하고 건강까지 챙겨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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