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반찬홍씨의 부인이 맛깔스럽게 보이는 깍두기와 벌겋게 버무린 배추김치, 양파와 마늘, 새우젓갈, 송송 썬 매운 고추, 된장 한 접시를 식탁 위에 주섬주섬 놓는다
이종찬
순대집에서 우연찮게 만난 그 여고생과의 첫 펜팔 "야~ 배도 출출한 데 조기(저기) 가서 순대나 묵고(먹고) 가자.""니 순대 사 묵을 돈 있나? 내는 집에 돌아갈 버스비뿐이다.""걱정 꺼뿌라(꺼라). 저 집 우리 고모가 하는 가게 아이가.""아무리 고모라 캐도 우리캉 떼지어 몰려가 돈 안 주고 막 묵어도 되나. 니 혼자라모 몰라도."1970년대 중반. 나그네가 마산 회원동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 옆에 꽤 큰 재래시장이 있었다. 육류, 생선, 채소, 옷, 신발, 가전제품 등 그야말로 사람에게 필요한 건 몽땅 다 있다는 그 시장 한 귀퉁이에 순대를 파는 자그마한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다. 그 순대집은 같은 반 동무의 고모가 하는 집이었다.
우리들은 학교수업을 마치고 나면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순대집에 들러 학교 선생님 이야기, 여학생과 펜팔하고 있다는 이야기, 장래에 무엇이 되겠다는 이야기 등을 나누며 순대를 소금에 찍어먹곤 했다. 순대집을 하고 있는 그 동무의 고모 또한 마음씨가 참 넉넉하고 좋았다. 까닭에 우리들은 누구나 그 순대집 주인을 고모라 불렀다.
그 고모는 우리들이 순대를 다 먹고 나면 어김없이 '가다가 나눠 먹어라'며 조금 전에 우리들이 먹은 그 순대보다 더 많은 순대를 공짜로 푸짐하게 싸주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순대집에는 여고생들도 자주 와 순대를 먹거나 싸가곤 했다. 우리들은 더욱 신이 났다. 순대를 먹으며 예쁜 여고생도 슬쩍슬쩍 훔쳐볼 수가 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였다.
그때 우연찮게 만난 그 여고생. 나그네는 쌍꺼풀이 예쁘게 진 그 가시나가 마음에 쏘옥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어김없이 그 순대집에 들러 그 가시나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돈이 없어 순대집 주변만 뱅뱅 돌던 나그네가 애처로워 보였을까. 하루는 그 순대집 누나가 쌩긋 웃으며 그 가시나의 주소를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나그네의 첫 펜팔은 그렇게 그 순대집을 인연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