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18년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젠틸레스키
그러나 이런 악조건을 딛고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남성 못지않은 성취를 이룩한 강하고 개성적인 여성 미술가들도 있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년). 그녀는 여성화가의 일반적 규칙을 깨고 성경과 신화의 주인공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 화려한 성공을 거둔, 서양 미술사에서 금녀(禁女)의 영역에 도전한 최초의 여성화가이다.
한 남자의 품에 안겼던 부드러운 소녀였을 유디트. 그녀가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고 싸늘하게. 서양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의 수줍은 눈짓이나 옆으로 돌린 시선을 찾아볼 수 없다. 유디트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살인현장은 충분히 끔찍스럽다.
유디트의 칼이 유대민족의 원수 홀로페르네스의 목에 반쯤 꽂혀있고, 그녀를 돕는 하녀는 죽음의 공포에 에워싸인 홀로페르네스를 옆에서 꽉 붙들고 있다. 그의 목에서는 검붉은 피가 솟아올라 흰 침대를 적시고 있다. 하얀 시트의 주름진 골을 따라 흐르는 피는 마치 진짜같다. 그 '더러운' 피를 안 묻히고자 팔을 걷어붙인 모습에서 그녀가 용의주도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유디트는 아시리아인들로부터 민족을 구해낸 유대의 영웅이고, 홀로페르네스는 유대인들을 공격했던 아시리아의 장수이다. 유디트는 앗시리아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적진에 들어가 적장 홀로페르네스 장군을 유혹하고 잠든 틈에 칼로 죽인 여인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고향 티란의 베툴리아를 해방시켰다.
젠틸레스키에게 이 작품은 격정적인 분노와 정의의 구현이라는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여성을 배제하던 공적 영역에서 여성 역시 도덕적인 행위를 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여성의 규준을 초월한 여성영웅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림 속 주인공 유디트는 미모의 연약한 여성이 아니다. 자기보다 힘이 강한 남성을 당차게 물리치는 용감한 영웅의 모습이다. 근육질의 에너지 넘치는 여전사는 예전의 서양미술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여성상이며, 정신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남성을 압도한다. 그림 안에서 여성의 육체적 힘을 포착하여 표현한 점은 서양회화사에서 전례가 없다.
남성욕망의 비극적인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자를 희생시킨 여인인데도 남성화가들은 아래의 그림들이 보여주듯이 그녀를 달콤하고 감각적으로만 묘사했다. 그러나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는 다르다. 그녀는 남성의 성적욕망의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