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굣길 아이들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건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아이들
안준철
학교 등굣길 오르막 언덕에 벚꽃이 한창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파른 오르막길이라 느려진 걸음걸이가 벚꽃 구경을 하느라 더 느려터지고 맙니다. 아예 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올려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꽃잎 하나가 하늘하늘 날아와 콧잔등에 떨어지기도 하지요. 한 번 더 그런 행운을 맞보기 위해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보기고 하고요.
이런 일종의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있는 사이, 아이들은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 힘에 겨운지 땅만 열심히 바라보며 오르막길을 올라갑니다. 그 중 한 아이를 불러 나무 아래로 오게 했습니다. 제가 이름을 알고 있는 아이였지요.
“수지야, 벚꽃 참 예쁘지? 이렇게 나무 아래서 올려다보면 더 예뻐 보여.”
“저는 꽃을 안 좋아해요.”
“꽃도 사람과 마찬가지야. 자꾸 바라보고 관심을 가져야 좋은 감정이 생기게 되거든.”
“저는 꽃을 봐도 아무런 감정이 안 생겨요.”
아이가 그렇게 대꾸를 했다고 김이 새거나 힘이 빠질 일은 아닙니다. 아이가 꽃을 안 좋아하는 것은 단지 꽃에 대한 추억이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니까요.
“나는 꽃이 너무 좋은데…. 저녁노을도 좋고. 그래서 꽃이나 노을을 보면 행복감을 느껴. 좋은 것이 많으면 그만큼 더 행복해지는 거지. 많은 돈이 없어도 말이야.”
“저도 노을은 좋아해요.”
“그래? 그럼 꽃도 좋아할 수 있겠다.”
“노력해볼게요.”
며칠 뒤, 등굣길 오르막이 청소구역인 국어교과 김 선생님이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저와 마주쳤습니다. 매일같이 청소시간마다 정문까지 걸어 나가야하는 불편함도 불편함이지만, 벚나무가 떨어뜨리는 꽃잎이나 낙엽을 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가 잠깐 오고 갔습니다. 국어교과 선생님답게 아이들의 정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요.
그날 하굣길이었습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내려가는 아이들을 제가 불러 세웠습니다. 얼굴이 낯익지 않은 것을 보아 1학년 아이들 같았습니다. 제가 서 있는 나무 아래까지 온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애들아, 저렇게 나무에 달린 것들은 온통 흰빛인데 여기 떨어진 꽃잎을 보면 연한 핏자국 같은 것이 보이지?”
“어디 봐요. 정말이네요.”
“사람도 말이야 멀리서 보면 모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런 상처들이 다 있을 수 있어.”
“에이 선생님, 그 말 어디 인터넷에서 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