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전도.김정호의 수선전도(首善全圖)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왼쪽 아래가 경희궁이다. 김정호가 그린 수선전도에는 경희궁이 운종가를 지나 흥인지문과 일직선상에 있다.
이정근
인조는 흐뭇했다. 세자가 대통을 잇고 그의 아들 원손이 보위에 오르면 종묘사직은 튼실할 것 같았다. 이제 어떠한 국난이 닥쳐도 정묘년 때처럼 세자가 허둥지둥 피신하는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분조(分朝)하면 나라의 위기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국강병으로 외국의 침략을 격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몽진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조는 가례교서를 반포했다.
“왕은 이른다. 대혼(大昏)은 만세를 잇는 것이다. 이제 세자가 성혼하였으니 그 빛이 빛나지 않는가? 왕실의 아름다운 덕화를 상고해 보면 반드시 지어미의 유순함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나는 태자를 세움에 먼저 배필 구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다. 선인의 교훈대로 덕을 기준으로 힘써 구하였고 조정에서 세신(世臣)에게 물어 명문가의 출신을 얻었다. 드디어 강석기의 둘째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하였고 세자가 초계(醮戒)하여 친영을 마쳤다. 육례를 이미 갖춤은 만복의 근원이며 이것은 종사의 큰 복이니 신민은 경복하라.”정월 초하룻날. 새해가 밝았다. 새 신랑이 된 세자가 처음 맞는 새해다.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본조(本朝)의 진하례(陳賀禮)를 거행하였다. 강빈도 배행했다. 그런데 새색시 강빈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다음날 사헌부에서 득달같이 상언이 올라왔다.
“왕세자빈이 조현(朝見)할 적에 타고 온 연(輦)의 뒤를 배종한 시녀들이 말을 타고 숭정문 앞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시강원은 제대로 규검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날 연의 뒤를 수행한 관원을 문책하시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병방 승지를 추고하소서.”
궐내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 타고 통행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대소신료들도 금기사항인데 하물며 시녀들이 말을 타고 궁에 들어왔으니 대궐이 발칵 뒤집혔다. 시녀들은 여자다. 조선은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를 내린 유교사회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일 사건이 터진 것이다. 연루된 시강원 관원과 병방승지가 줄줄이 문책 당했다.
사고 친 세자빈, 계산된 도발이었을까?강빈은 사대부집 출신이다. 더구나 아버지가 승지다. 궁중법도를 모를 리 없다. 위로는 대왕대비(인목대비)가 있고 중전이 있지만 내명부 서열 3위다. 연을 타고 앞서가는 강빈이 뒤 따라오는 말발굽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다. 계산된 도발이었을까? 강빈이 어리고 새색시이기 때문에 아랫것들을 지휘할 힘이 없었을까?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시작된 것일까?
가례를 마친 인조는 공신 및 그의 적장자들과 함께 북악에서 회맹제(會盟祭)를 가졌다. 임금이 원유관과 강사포 차림으로 여(轝)를 타고 악차(幄次)에 도착했다. 면복(冕服)을 갖춘 왕세자와 복장을 갖춘 배제관(陪祭官) 및 집사관(執事官)들이 모두 들어와 의식 절차에 맞춰 예를 거행하였다.
회맹의식은 단(壇)을 세우고 남면(南面)하여 완석(莞席)을 깔았다. 소 한 마리, 양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를 제단에 희생으로 바쳤다. 왕이 신하들의 충성을 확약하고 주입시키는 회맹단은 경복궁 신무문 북쪽에 있었다. 오늘날 청와대 자리다.
“공훈을 기리는 뜻에서 같이 맹세를 하니 신명(神明)이 보증하는 바이다. 단서(丹書)에 분명히 기록하여 종묘사직의 영화를 같이 할 것을 산하(山河)를 두고 맹세하는 바이며 앞으로 그대들의 자손에게도 두고두고 영화를 누리게 할 것이다. 오늘 이후로 천세(世)에 이르기까지 군신 상하의 은혜와 의리가 변함이 없을 것이며 하나의 절의를 시종 일관 견지하여 좋은 일 궂은일을 함께 감당할 것이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길 경우에는 하늘과 땅의 신령들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회맹단으로 공신 적장자들을 불러내어 가진 회맹의식은 선혈이 낭자했다. 살아 있는 양을 잡아 서로 그 피를 돌려 마시고 벌건 입술로 서약(誓約)을 꼭 지킨다는 단심(丹心)을 신(神)에게 맹세하는 의식을 삽혈동맹(歃血同盟)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