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장? 아니, 노래방!일제강점기 때 양조장이었던 '붉은 벽돌' 건물은, 해방 뒤 창고로 쓰이다가 한동안 캬바레로 쓰이다가, 이제는 노래방으로 쓰입니다. 앞으로 몇 해쯤 지나면 '옛 양조장 건물'은 우리 나라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릴 텐데, 그때 가서야 이런 양조장을 되살린다 뭘 한다 하지 말고, 지금부터 이런 역사 깃든 건물을 잘 추슬러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지만, 글쎄요. 헛꿈 같게만 느껴집니다.
최종규
그런데 뒷날 제가 서울에서 여덟 해 남짓 살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어릴 적에는 머리 아프고 숨쉬기 어려운 서울에서는 안 살 테야 하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이 그렇게 쉽게 깨질 줄은.
서울 나들이를 할 적마다 저를 보는 서울사람들이 ‘너, 서울사람 아니지?’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저 사람(어른)들은 어떻게 그걸 다 알까 싶어 놀랐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인천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보면, 내 느낌으로도 ‘저 사람은 인천사람 아니네’ 하는 티가 물씬 풍겼습니다. 말씨도 다르지만 몸짓도 다르고, 바라보는 눈길과 눈썰미가 다르거든요.
.. 우리 사회는 특히 5ㆍ16 이후의 개발독재 아래 농촌 및 지역의 독자성은 파괴되고 서울로 지나치게 통일되었다. 더구나 민주주의의 진정한 기초라고 일컬어지는 지방자치제도가 오랫동안 유보됨으로써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이 서울을 향해 질주하였던 것이다 .. (53쪽/1991)서울과 얽힌 옛말이 여럿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 서울 가는 놈이 눈썹을 빼고 간다. 서울 가서 김 서방 찾는다. 서울놈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 서울서 매 맞고 송도서 주먹질한다.
이런저런 옛말을 듣고 배우면서 늘 ‘왜 사람을 서울로 보내야 하나? 자기가 나고자란 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면서 자기가 나고자란 곳을 알뜰살뜰 키우면 되지 않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큰일을 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말은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흔히 들었습니다. 사람이 크려면 물이 좋은(?) 곳에서 커야 한다고 말하고, 사람 많은 곳에 가야 돈도 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며 늘 ‘왜? 왜? 왜 자꾸 서울 이야기만 해? 우리 동네 이야기는 왜 안 해?’ 하고 대들듯 따졌지만, 저한테 돌아오는 대꾸는 한결같이 ‘넌, 아직 어리구나.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커서 큰물을 한번 먹어 봐야지.’ 한 마디.
.. 요즘 경인선은 살풍경이다. 인천과 서울 사이가 이제는 빈틈없이 시멘트 건물로 들어차 숨이 막힌다. 경인선 개통 한 세기만에 서울과 인천 사이에 시골은 멸종하고 말았다 .. (101쪽/1996)아버지가 빚까지 얻어가며 마흔여덟 평짜리 새 아파트로 집을 옮기지 않았다면, 저는 인천에 눌러앉지 않았겠느냐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옛날 일이지만.
그곳이 좁은 우물일지라도, 더 많은 사람과 더 넓은 세상을 못 보는 일이라고 해도, 제가 나고자란 곳에서 조용히, 고즈넉히, 아옹다옹을 하든 쿵떡쿵떡을 하든 제가 선 자리에서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집안 문제를 넘어서, 대학입시 원서를 내야 하는 때가 다가와 고3 담임이 상담을 할 때, ‘웬만하면 인천에 있는 대학교에 가라’는 말에 불뚝불뚝 싫은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왜 거기를 가야 하는데? 재단비리가 철철 넘치는 그곳에 왜 가야 하는데(그때는 끔찍했는데, 이제는 이 비리 문제가 많이 풀렸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학문은 인천에 있는 대학에서는 안 가르쳐 주는데?
한낱 고3 수험생이 어떤 건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인천이든 서울이든 대구이든 부산이든 제주이든, 대학교에서 꾸리는 학과가 거의 똑같은 모습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서울에 있으면 서울이라는 곳 특성을, 제주에 있으면 제주라는 곳 특성을, 대전에 있으면 대전이라는 곳 특성을 키우는 대학교여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했습니다. 왜 모든 대학교가 한결같이 영문과 일문과 경영학과 의학과 기계공학과 전자공학과 건축과 법학과 무역학과 …… 똑같은 학과를 꾸리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