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도. 강감찬 장군 영정의 오른쪽에 있다.
김종성
위에서 소개한, 10세기부터 형성된 첫 번째 시대의 세력균형은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인해 한층 더 견고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바로 그 점에서 귀주대첩의 역사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만약 강감찬의 고려군이 귀주에서 요나라 군대를 물리치지 못했다면, 고려만 위험해지는 게 아니라 송나라는 물론 서하까지도 운명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한반도가 동아시아에서 독특한 전략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의 베이징 혹은 황하 유역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 지역은 바로 한반도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해로를 통해 랴오둥반도(요동반도)나 산둥반도(산동반도) 등을 공격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수나라·당나라의 황제들은 지역패권 장악의 전제조건으로서 한반도 제압을 최우선적 위치에 두었다. 한반도를 그냥 두고는 그 위쪽의 요동(만주)을 마음 놓고 공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양제·당태종이 결국 실패한 것은 한반도를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한무제나 당고종이 결국 성공한 것은 한반도를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위와 같이 한반도를 장악한 뒤에 마음 놓고 요동을 공격하려 한 한족 왕조들처럼, 거란족·여진족·몽골족·만주족 등 북방민족들 역시 그런 관점에서 한반도를 이용하려 했다. 한반도를 옆에 두고는 마음 놓고 중원을 침략할 수 없다는 전략적 인식 하에 한반도를 어떻게든 자기편으로 만들어 두려 했던 것이다.
몽골족·만주족은 결국 한반도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여 중국 전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지만, 거란족의 요나라나 여진족의 금나라는 한반도를 완전한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에 실패하여 결국 세력균형에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려는 요나라나 금나라와 친선을 유지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일정 거리를 두는 전략을 고수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요나라가 마음 놓고 중원을 공략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요나라가 오늘날의 베이징 이북 지역에 만족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 사건이었다. 귀주에서 고려에 대패한 요나라는 그런 고려를 등 뒤에 놓고서는 마음 편히 중원으로 남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당사자인 고려가 생존했음은 물론이고 송나라나 서하도 안심하고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