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낙천정 편액
이정근
“낙천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는가?”
“좌상 박은대감이 지었습니다.”
“무슨 뜻이라 하던가?”
“주역의 계사(繫辭)에서 낙천(樂天)이란 두 자를 따와서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경은 어떻게 해석하나?”
“주상전하께 왕위를 물려주신 상왕전하께서 때때로 보시고 노시며 만년을 편하게 보내시라는 뜻이라 사료됩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게 편하게 놀아라?”
마뜩지 않은 표정을 짓던 태종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때 태종 나이 52세였다.
“낙천이란 두 글자를 풀어보도록 하라.”
“범인(凡人)들은 세상과 인생을 즐겁고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라 하나 하늘이라는 것은 이치일 뿐이요, 낙이란 것은 억지로 애쓰지 아니하고 자연히 이치에 합하는 것을 이름입니다. 대개 무극(無極)의 진(眞)과 이오(二五)의 정이 묘하게 엉기어서 사람이 생기는 것인즉, 천리가 사람에게 품부(稟賦)된 것은 이와 같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경과 같이 박식한 신하가 있다는 것이 내 심히 마음 든든하도다. 허나 낙천(樂天)을 요천(樂天)으로 생각하는 미욱한 신하가 있을까 염려된다.”
한자는 상형문자다. 그러나 상형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개념과 존재가 있다. 이를 모양(形)과 소리(音)와 뜻(義)의 세 요소로 표현하도록 한 것이 육서(六書)다. 육서에 전주문자(轉注文字)가 있다. 락(樂)이 음악(音樂), 오락(娛樂), 요산요수(樂山樂水)로 표현되듯이 낙천을 요천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한 마디로 더 일해야겠다는 자신을 신하들이 알아주지 못한다는 질타다.
그릇이 큰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형삼각산을 뒤로 하고 태종이 좌정했다. 옆자리에 세종도 자리를 잡았다. 태백준령 깊은 골에서 발원한 한강물이 넘실댄다. 도도하지만 낙천정 아래다. 강 건너 송파진까지 넓은 강폭에 짙푸른 한강물이 바다와도 같다. 남한산과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확 트이고 시원하다. 끝이 아스라한 잠실벌에 천군만마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다. 그릇이 큰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형이다.
대마도에 출정했던 야전군 총사령관 이종무 장군을 필두로 우박·박성양·서성재·상양·이징석이 상왕 태종과 임금 세종에게 승전을 보고했다.
“제장들의 승전으로 백성들의 걱정을 덜어주었고 나라의 근심을 씻어주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늘날의 계획으로는 병선을 더 만드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다. 함길도와 평안도에 명하여 각각 병선을 더 만들게 하였는데 강원도에는 소나무가 많을 것이니 강원도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하여 경상도로 보내어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수군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태종은 환관 최한으로 하여금 장수들에게 술을 치게 하고 주연을 베풀었다. 태종을 배행했던 종친과 대신들도 참례한 연회는 날이 저물어서 파했다. 전투에 참여했던 장수들을 위로한 태종은 선양정으로 삼도도통사 유정현을 초치하여 별도로 주연을 베풀었다. 이종무·최윤덕·이지실·이순몽·우박·박성양·박초·이천 등 여러 장수들도 참례했다. 4품 이상의 종사관과 병마사가 모두 참석했다.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수성이다연회는 흥겹게 베풀어졌다. 여러 장수들이 차례로 잔을 올리고 번갈아 춤을 추었다. 우의정 이원과 최윤덕이 각기 적군을 방어하는 계책을 토론했다. 영의정 유정현이 태종에게 술을 올리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창업의 어려움과 수성(守成)의 쉽지 않음을 날마다 생각해야 하실 것입니다.”
“내가 할 말을 영상이 하는구려.”
흡족한 미소를 띠우던 태종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세종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수성이란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주상은 잘 들어 두어라.”이러한 태종의 소신은 유시(諭示가 되어 세종14년, 함길도 북변에 김종서를 보내어 4군과 육진을 설치함으로서 현실화 되었다.
왜구를 크게 무찔러 공을 세운 장수가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이다. 아기바투(阿其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대파하여 황산대첩(荒山大捷)의 위업을 작성한 곳이 남원 운봉이다. 내륙 깊숙이 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히는 왜구를 당하고 몰아낸 것이 아니라 쫓아가서 항복을 받아낸 것이 대마도 정벌이다. 발상이 다르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평범한 진리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태종은 연회가 파할 무렵, 유정현과 이종무에게 각각 말 한 필과 안장 한 벌씩을 하사했다. 윤덕 등 일곱 사람에게는 각각 말 한 필씩을 하사하고, 병마사 이하 군관 중 정벌에 나가서 공이 있는 자에게는 차등대로 상을 내리게 하였다. 또한 동지총제 이춘생에게 술을 하사하여 동정군중(東征軍中)에 나아가 제장들을 위로하라 명했다.
승전보에 고무된 조선 조정은 잔치가 벌어졌다. 논공행상이다. 이종무를 의정부 찬성사, 이순몽을 좌군 총제, 박성양을 우군 동지총제로 승차 임명했다. 정벌에 참여한 여러 절제사는 모두 좌목(座目)을 올리고 전사한 병마부사 이상은 쌀과 콩 각각 8석, 군관은 각각 5석, 군정은 사람마다 3석을 위로품으로 내려주었다. 동정(東征)에 공을 세워 상직을 받은 자가 2백여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