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가 조선 서적들을 약탈해간 강화도 고려궁지 내 외규장각.
김종성
서세동점 시기의 동양이 서양에게 진 것은 문명의 열세 때문이었까? 이 문제를 ‘문명의 수준 차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9세기 당시의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을 능가했다는 점이 실증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어떤 경로론가 그런 ‘신화’가 퍼졌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19세기에 발생한 현상들을 중심으로 동서양 문명의 수준을 실제로 비교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느 문명이 더 우수했는가를 밝히는 것은 단순히 서양에 대해 고루한 우월감을 갖기 위한 게 아니다.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동양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문화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절차라고 말할 수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 프랑스군이 물러나긴 했지만, 대포를 포함한 무기의 성능 면에서는 프랑스군이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조선은 물론 청나라·일본 등에게도 선보인 서양 대포의 우수성은 이후 동양인들에게 문명적 열등감을 갖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강화도에 있는 구한말 유적지들의 안내문을 보더라도, 조선 군대의 대포가 서양 군대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낙후했다는 점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기를 포함한 전투력 하나만으로 문명의 수준을 비교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태도다. 오늘날 북한과 미국의 대결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 간 대결은 꼭 군사력의 우열만으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다. 군사적 우위가 또 다른 요인들에 의해 상쇄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19세기의 서양이 동양에 비해 우수한 대포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전반적인 기술수준에서는 동양이 서양을 능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점은 서양인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도 잘 드러나는 사실이다.
도널드 라크와 에드윈 클레이는 1965년에 쓴 <유럽을 만든 아시아>라는 책에서 16, 7세기에 유럽의 선교사·상인·선장·의사·선원·병사·여행자 등에 의해 수백 권의 아시아 관련 서적이 유럽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혀졌다고 증언했다. 이들의 직업분포로 볼 때에 기술서적을 포함한 다양한 책들이 번역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시어도어 포스가 1986년에 쓴 중국 비단업에 관한 논문에 따르면, 18세기까지만 해도 서양인들은 중국의 기술서·실용서 등을 번역하는 데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미국·일본의 기술서적들을 번역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9세기에 와서 서양 대포가 동양 대포를 능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반적인 기술수준에서는 19세기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동양이 서양을 능가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병인양요 때에 강화도에 침투한 프랑스 군대가 외규장각에서 345권의 서적을 약탈해간 것 역시 동서양의 문화적 수준 차이를 보여주는 한 가지 증거가 될 것이다. 무기 성능에서는 분명히 프랑스 군대가 앞섰지만, 문화적 수준에서는 조선이 앞섰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프랑스 군인들이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살벌하고 정신없는 전투현장에서, 무슨 글자인지도 모르는 남의 나라 책을 정신없이 집어드는 프랑스 군인들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베이징 웬밍웬(원명원)에서의 경우처럼 건물은 죄다 불태우고 부수면서도 유독 동양 서적에 대해서는 유별난 관심을 갖는 프랑스 군인들의 심리 속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만약 동양 문화에 대한 외경심이 없었다면, 프랑스 군인들은 분명히 외규장각 자체를 다 불태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늘날 한국과 프랑스 간에 외규장각 도서 반환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의식 속에 ‘동양 서적은 귀하다’ ‘동양 문명은 우수하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관념이 보통 이상으로 강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전투현장의 군인들이 정신없이 책을 수집하는 장면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한글서적과 영문서적 중에서 일단 영문서적이 귀한 책일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듯이, 당시의 프랑스 군인들 아니 서양인들에게도 그와 유사한 심리상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