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에 청·일 간에 체결된 베이징전약의 영문본 및 중국어본.
김종성
유구인들이 살해된 사건을 놓고 일본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한 청나라의 태도는 ‘유구는 일본의 영향권 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유구의 양속 상태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유구는 국제적으로 일본의 영향권 하에 있는 지역임이 인정되었다. 청나라는 유구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는 대신 대만을 지키는 데에만 성공했다.
그런데 일본은 1874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국내정세의 불안정 때문에 유구에 대한 공세를 더 이상 추진하지 못했다. 이 시기의 유구는 일종의 잠정적인 보호국 상태였다.
유구에 대해 관망의 자세를 취하던 일본을 자극한 결정적 계기가 하나 있었다. 1876년에 런던에서 발행된 잡지에 실린 기사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사에서는 ‘유구는 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이므로, 영국이 동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이 유구를 남보다 먼저 점령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이 유구를 확실히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영국 잡지에서 이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의 이 잡지는 1877년에 영국유학파 교육자인 모리 아리노리(훗날 제1차 이토우 히로부미 내각의 문부대신)라는 인물을 거쳐 일본 법무상 이와구라 도모미에게 전달되어 일본정부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잘못하면 영국에게 유구를 빼앗길 수도 있겠다는 판단에 조급해진 일본은 서둘러 유구합병을 추진하게 되었다. 1878년 말부터 일본의 국내정세가 안정된 점도 일본 정부가 유구합병에 속력을 내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청나라는 이미 1874년에 유구를 사실상 포기했고 영국은 아직 유구에 손을 뻗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1879년 3월에, 일본은 이토우 히로부미의 지휘 하에 유구합병을 전격적으로 성사시켰다. 그리고 유구를 오키나와로 바꾸고 일본의 행정단위인 현으로 편입시켰다.
이 유구합병은 청나라가 같은 해인 1879년부터 조선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시도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유구에 이어 조선마저 일본이나 러시아에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청나라가 조급해진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동아시아 정세는 일종의 도미노 현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일본은 영국이 유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1870년대 중반 이후로 유구합병작업을 서둘렀으며, 결국 유구를 일본령 오키나와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오키나와 지배는 일본이 조선과 대만으로 영향력을 팽창시키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가 하는 점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를 전승국 미국으로부터 결국 되찾아왔다는 사실로부터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에는 영국이, 20세기 중반에는 미국이 눈독들이던 오키나와는 일본의 강한 집착과 적극적 태도로 인해 오늘날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공유하기
영국이 눈독들이던 오키나와, 일본이 먼저 합병하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