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 샘물교회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권혁수 장로는 "구한말에 미국 선교사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했다"는 주장을 해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사진은 분당 샘물교회 건물.
오마이뉴스 남소연
셋째, 토마스는 한 때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에 편승하여 조선선교를 기획한 적이 있을 정도로, 하나님보다는 제국주의침략자들에게 더 의존한 인물이었다. 그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의 정당성 여부를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토마스의 1866년 8월 1일자 서한을 연구한 김승태는 1995년 7월호 <복음과 상황>에 기고한 '토마스 목사의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과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라는 논문에서, 셔먼호 사건 직전에 토마스가 로즈 제독 휘하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에 참여하겠다고 신청하여 승인을 얻은 사실이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
26세의 열혈 청년이었던 그는 '조선을 처음 방문한 개신교 선교사'가 되려는 열망에 몰입된 나머지, 이처럼 아무 거리낌도 없이 부당한 방법으로 조선선교의 꿈을 이루려 했다.
1832년에 이미 귀츠라프라는 개신교 목사가 최초로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최초' 타이틀을 쓰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경보다는 기네스북이 더 소중할 것이다.
[의문④] 목사님의 최우선 관심사는 '교역'넷째, 제너럴셔먼호에서 토마스와 접촉한 조선 관리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토마스는 진중한 목사라기보다는 차라리 허풍스러운 상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본업이 목사라고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당시의 탐문기록을 전하고 있는 <평양지> 등에 따르면, 권총과 환도를 차고 조선 관리들을 응대한 토마스 '목사님'은 "우리의 최우선 관심사는 교역"이라면서 "조선이 우리와 교역을 하면, 내가 직접 베이징에 가서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을 만류해보겠노라"고 허풍을 치기도 하였다.
상선의 일개 통역관이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을 막아주겠다는 말을 했다면, 당시의 조선 관헌들이 그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시라도 이 청년이 서양의 성직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의문⑤] 성경 뿌리며 죽었다? 목숨 구걸하며 죽었다다섯째, 알려진 대로 토마스는 죽기까지 복음을 전파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는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하는 등 '성직자'라기보다는 그냥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에 전설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토마스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1866년 7월 24일 정오 무렵 평양성의 군민들이 제너럴셔먼호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토마스 목사는 죽기 직전까지 강안의 군중을 향해 성경을 뿌렸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군인에게까지 성경을 건네주었다. 그 군인은 그때 받은 성경을 읽고 나서 감화되어 훗날 개신교인이 되었다."그러나 이런 '전설'의 기초가 되고 있는 미국인 선교사 게일(J.S. Gale)과 오문환 목사의 저술이 실제로는 사건 발생 수십 년 후에 나이든 개신교도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위의 이야기를 입증할 객관적 자료는 없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토마스 목사의 최후에 관해서라면, 사건 당시 기록된 조선측 문서가 훨씬 더 신빙성이 높을 것이다. 당시의 기록은 토마스가 목사라는 사실을 모른 상태에서 쓰인 것이므로, 조선측이 개신교를 모독하기 위해 사실을 조작했을 것이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당시의 조선 관헌들은 이 약간 '시건방진' 셔먼호 통역이 설마 목사님라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운하견문록>에 수록되어 있는 <적호기>에 따르면, 제너럴셔먼호가 불타던 그날 "(토마스는) 뱃머리에 나와 서서 조선 중군이 잃어버린 인신(印信, 신표)을 창끝에 걸고 바치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조선 중군(관직명)에게서 빼앗은 신표를 돌려줄 테니 나를 살려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의 친구이자 유명한 시인인 조면호의 <서사잡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궁지에 몰린 토마스가 배에서 뛰어내려 항복을 했으나, 분노한 평양성 주민들이 그를 때리고 짓밟아 죽였다는 것이다.
분노한 주민들이 토마스를 죽인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