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사람안준철
느리다 못해 아예 멈춘 듯이 보이는 냇물도 시가지를 벗어나는데 한나절이면 족할 것이다. 내 걸음이 아무리 느려 터져도 시간 안에 행사장에 도착할 것도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가을의 속도는? 한반도 남쪽의 단풍은 9월 말 즈음 설악산과 오대산의 산 머리에서 시작하며, 산 아래쪽으로는 하루 40m씩, 남쪽으로는 하루 25Km씩 이동한다고 한다.
이에 비해 시의 속도는 얼마나 느리고 답답한가. 하루 25Km는커녕 밤을 꼬박 새우고도 단 한 개의 시어도 건지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고 마는 일이 부지기수다.
아, 좋은 시를 빨리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그런 꿈을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나의 한계를 일찌감치 알아버린 탓도 있지만, 언제부턴가 나에게는 뽐내고 싶은 한 편의 빼어난 시보다도 시가 만들어지는 그 과정의 시간들이 더 소중해졌기 때문이다.
시를 쓰다 보면 몇 번이고 떠올렸던 일을 다시 떠올리고, 매만졌던 시어를 다시 매만지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심지어는 시상이 떠오른 최초의 시간이나 현장으로 되돌아가, 이미 사라졌거나 시들해진 그때의 감동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할 때도 있다.
그렇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은 이 광속의 시대에 유일하게 나를 돌아보게 하는 사색의 시간이요, 나의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케 하는 성찰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