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예쁜 그 아이

"과거는 흘러간 물이야"... 그 아이는 자신과 한 약속을 잘 지켰다

등록 2007.06.25 19:03수정 2007.06.26 11:1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첫 만남부터 지각하는 아이
아침부터 잠만 자던 아이
하고 싶은 게 뭐냐 물으면
아무것도 없다며 눈을 내리던 아이
간혹 입에서 담배냄새가 나 물으면
나 그런 거 모른다며 인상 쓰는 아이
그러다 어느 날 그냥 노는 게 좋다며
세상 숲으로 날아간 아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던 그 아이에게
암수술을 하던 아버지의 눈물어린 말과
외숙모의 사랑한다는 말에 마음을 돌려
다시 세상 숲에서 돌아온 아이
아홉시 넘어 교실문을 밀치던 그 아이
요즘은 여덟시가 되면 교실로 들어오는 아이
너무나 예쁜 그 아이
초록빛 얼굴을 한 그 아이
오늘
그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한 달 동안 나오지 않다 그 아이가 학교에 나온 지 오늘(25일)로 열흘째다. 그 열흘 동안 아이는 묵묵히 자신이 할 일만 했다. 아침 일찍 등교하면 학생부실에서 지정한 봉사활동을 했다. 가끔 아이를 불러 "힘들지 않니?" 하고 물으면 괜찮다며 싱겁게 엷은 미소로 넘어갔다. 그것뿐이었다.

그 아이에게 이런저런 주문을 하지 않았다. 자신과의 약속만 지키라고 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켰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을 그 아이는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아이는 변해 있었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얼마나 오래갈까 염려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너무 예뻐 보였다.

그 아이가 없는 종례시간, 반 아이들에게 그 아이를 듬뿍 칭찬을 했다. 그 아이가 직접 그 칭찬을 들으면 어떨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들은 아이들의 입을 통해 그 아이 귀로 전해질 것이다.

"얘들아, 요즘 선우(가명) 정말 예쁘지 않니? 난 선우만 보면 정말 기쁘다."
"네, 예뻐요. 우리도 좋아요."

"그런데 많이 속 썩였는데도 예뻐요?"
"야, 과거는 흘러간 물이야. 과거에 아무리 물이 맑았어도 지금 흐리면 마실 수 없잖아. 반대로 과거에 탁한 물이었어도 지금 맑고 깨끗하면 그게 좋은 물인 거야. 지금 선우가 그래."



아이들에게 칭찬은 그렇게 했지만 그 아이가 칭찬을 받을만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칭찬받을만한 구석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성적 면에선 학년 전체에서 맨 뒤다. 그렇다고 눈치 있게 행동하지도 않는다.

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아침이면 책상에 엎드리곤 한다. 엊그젠 흡연 때문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 아이가 대견하고 예뻐 보였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아이가 일찍 학교에 오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어쩌면 그 아이는 수업시간마다 줄곧 책상에 엎드려 있을지 모른다. 그로 인해 혼이 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 그 아이가 내게 예쁘게 보인다. 그건 그 아이의 변화를 믿기 때문이다.

그 아이에게 모든 걸 잘하라고 할 수는 없다. 못하는 걸 다 잘하라고 하는 건 어른의 욕심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 많은 그 아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학교에 오는 것만으로 그 아이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학교에 다시 돌아오기까진 아이 외숙모의 힘이 컸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부모나 이웃, 학교의 관심밖에 있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관심 받을만한 모습이 별로 없다고 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덩치는 큰데 말이 없었고, 우울한 표정을 짓고 멍하니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무슨 이야길 하면 다른 아이들보다 한두 박자 늦게 이해하고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는 부모에게도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무관심으로 자라왔다.

그런 그 아이에게도 관심을 둬주는 사람이 아이의 외숙모였다. 엄마 대신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에 온 것도 외숙모였다. 아이를 옆에 앉혀 두고 손을 잡고 "우리 선우 예쁘다"고 한 것도 외숙모였다. 그런 아이에게 난 한마디만 했다.

"선우야,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너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넌 행복한 거야. 그것이 한 사람밖에 없을지라도. 네가 힘들고 지칠 때 널 생각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면 넌 기운을 낼 수 있을 거야."

그 뒤로 그 아이는 무조건 싫다는 학교에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변화된 모습의 하나로 아침 일찍 등교한다. 그 하나로도 그 아이는 내게 예쁨 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열 가지 장점 중에 한 가지 단점을 보고 뭐라고 하면 미워지기도 하고, 열 가지 단점 중에서 한 가지 장점을 보고 좋아하면 예뻐지기도 한다는 것을. 결국 사람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상대를 바라보는 마음이지 상대의 문제점이 아니란 것을.
#아이 #학교 #시 #관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너! 나! 따로 가지 말고 함께 가자.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3. 3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4. 4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5. 5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