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이 아니라 미군이 할머니 죽였다"

한 원로 목사, 타계 직전 아들에게 알려...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진실 규명해야

등록 2007.06.17 15:22수정 2007.06.1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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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타계한 기독교계 원로 목사 ㄱ씨의 집안 이야기다. ㄱ씨의 뒤를 이어 3대째 목사를 하는 아들 ㄴ씨는 현재 수도권의 ㄷ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재직하고 있다. 4~5년 전에는 어느 유력한 기독교 신문에서 이 ㄴ씨를 '미래 한국 교회를 이끌어갈 젊은 목사'로 선정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이 집안은 기독교 내의 명문 가문이다.

최근에 필자와 개인적으로 만난 ㄴ씨 말에 따르면 ㄱ씨가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중공군이 아니라 미군이 네 할머니를 죽였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할머니가 한국전쟁 때에 중공군 총에 맞아 사망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 ㄱ씨의 갑작스러운 이 말에 그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ㄱ씨가 ㄴ씨에게 전한 사연은 이렇다(ㄱ씨가 전한 말을 ㄱ씨를 '나'로 해서 재구성했다).

한 원로목사, 타계 전 진실 밝혀

1대 목사인 내 아버지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내게는 작은 아버지이었다. 미군 점령에 반대한 작은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전에 임진강 이북을 넘어갔다. 소위 '월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우리 집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보복공격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미군 병사들이 갑작스레 집안에 들이닥쳤다. 우리를 체포하러 온 게 아니라 전부 다 학살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때 집에는 나와 어머니만 있었다. 마당에 있던 우리는 갑작스러운 미군의 출현에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은 총을 들었고 총은 우리 모자를 겨냥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내 앞을 막아섰다. 뒤이어 미군의 무자비한 총알 세례가 퍼부어졌다. 우리는 바닥에 쓰러졌고 미군들은 곧 물러갔다. 잠시 후 어머니 몸 아래에 깔려 있던 나는 어머니 몸을 일으키고 일어섰다. 나는 미군이 물러가기까지 잠시 죽은 척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대신해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셨다.

그 후 아버지를 이어 목사가 된 나는 이로 인해 평생 괴로움을 느꼈다. 어머니가 미군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그 상황에서 나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로서 찢어지는 심정을 어쩔 길이 없었지만 미군이 쏘아대는 총탄 앞에서 나는 앞에 나설 수 없었다.


작은 할아버지 월북 때문에 닥친 재앙

죽음의 문턱에서 아들이기보다는 생명일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비애에 대해 무어라 정확한 가치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아무튼 ㄱ씨는 이 일 때문에 평생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고 한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들로서 어머니가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나무라면서 이후 50년 생을 산 것이다.

그런데 ㄱ씨는 "내 어머니를 죽인 건 미군"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미군이 죽였다고 하면 혹시라도 세상으로부터 오해를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ㄱ씨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운 심정도 컸지만 미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미국을 범죄자로 지목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후 ㄱ씨는 자녀들에게 "할머니를 죽인 사람들은 중공군"이라고 알려줬다. 그 때문에 ㄱ씨의 자녀들은 다들 중공군이 자신들의 할머니를 죽인 줄로만 알았다고.

그런데 죽기 얼마 전에 ㄱ씨가 아들 ㄴ씨를 부르더니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할머니를 살해한 장본인은 중공군이 아니라 바로 미군이었다'고.

그때 ㄱ씨는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받은 심정적 괴로움을 토로하면서 미군을 범죄자로 지목할 수 없었던 그 괴로움도 함께 털어놓았다고 한다.

ㄴ씨는 필자에게 "우리는 이제까지 중공군이 할머니를 죽인 줄로만 알았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범인은 미군이었다"면서 자기 집안에 얽힌 비극에 대해 괴로워했다.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현장에서 차마 함께 죽을 수 없었던 아들의 심정, 공포의 현장에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들 앞을 가로막았던 어머니의 마음. 우리는 그저 가슴이 뭉클하고 저릴 뿐이다.

"미군이 내 어머니를 죽였다"고 진실을 밝히지 못한 한 목사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를 탓하기보다는 가해자가 너무 무서워 피해자가 가해자를 지목할 수 없었던 우리 현대사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은 미국 앞에서 당당해지려 하고 있다. 몇 년 후면 전시작전통제권도 환수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에 신세 지지 않는 정치집단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한국은 이제 미국 없는 한반도에서 살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한국과 미국의 연결고리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 이상 미국의 과거 범죄에 대해 묵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본의 과거 범죄에 대해 명확히 비판을 하는 것처럼, 미국이 특히 한국전쟁에서 한국 국민들에게 저지른 '그 감추어진 범죄'를 당당히 밝히고, 사과 받을 것은 받고 보상받을 것도 받아내야 할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은 너그러움의 표현이라 볼 수 없다. 그것은 가해자의 비웃음을 사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피해를 자초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한국과 미국이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유지·발전시키려면, 그동안 덮여 있었던 미국의 잘못을 명확히 청산하고 그런 바탕 위에서 합리적이고 평등한 양국관계를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미국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미국을 배척하기 위한 게 아니라 미국을 진정한 친구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목사 #미군 #중공군 #학살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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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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