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규 디자이너가 책 전체를 디자인함으로써 <한국사>는 책 내용뿐 아니라 장정에도 새로운 전범이 되었다.한길사
아직 그런 걸 만들어낼 수 있는 제반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다는 외부로부터의 회의도 없지 않았지만,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면 이미 그 의미가 약화된다는 사실이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게 만들었다. 역사란 언제나 새롭게 발전하고 그 해석도 언제나 새로워져야 한다는 명제가 우리의 <한국사> 작업을 자극했다.
우리가 <한국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몇 가지 좀더 구체적인 문제의식이 전제되어 있었다. 아울러 <한국사>를 가능하게 하는 이 시대의 사회적 조건 및 민족적 상황에 대해 우리는 일정한 인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집대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식민지 통치시기로부터 해방된 지 반세기가 되었건만, 그 식민지시기를 비롯하여 자기 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다룬 '민족사'가 왜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의문을 우리는 갖게 된 것이다.
단일문화민족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견지해오면서 독창적인 문화와 사상을 창출해온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서술해내는 '한국사'를 민족성원이 공유한다는 것은 참으로 절실한 역사적·문화적 삶을 담보하는 조건이라 할 것이다.
작은 규모의 통사가 없는 바도 아니고, 또 큰 한국사 작업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오늘의 분단시대와 그 이전의 식민지시기를 제대로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분명히 갖고 있는 것이다. 전근대는 물론이고 근대 이후 식민지시기와 분단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사 전체의 모습을 가감 없이 제대로 담는 큰 한국사를 이 시대의 민족성원은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할 것이다.
1945년 일제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우리 민족은 자주적 통일 독립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분단되었고, 다시 서로가 전쟁까지 치렀다. 그러나 남과 북은 같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하나의 민족이기에, 갈라져 살고 있는 이 민족을 하나로 인식하는 한국사를 만들어내는 일은 분단시대를 사는 지식인은 물론이고 민주주의와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출판인들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과제일 터이다.
이데올로기로 인한 민족의 분단 및 그 분단사의 전개가 현재로는 '하나의 한국사'를 체계화하는 데 일정한 한계가 되겠지만, 그래도 현단계에서나마 가능한 대로 하나의 한국사를 만들어내는 일은 민족통일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는 민족출판의 실체적 내용의 일단이 되는 것이다.
식민지시기에 치열하게 전개된 엄연한 민족해방운동사도 남과 북에서 공히 왜곡되거나 폄하되는 역사서술이 자행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한국사>를 통해 잘못된 역사서술을 바로잡고,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서술하는 '하나의 우리 역사'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또 하나의 문제의식이다.
한 시대 한 사회의 인문사회과학적 인식은 물론 동시대인들의 정신적·물질적 삶의 운동을 종합하는 문화적 행위란 바로 민족사의 체계적 서술작업일 터이다. 4월혁명 이후, 특히 1970년대 이후 각성되고 실천된 학문적·사상적 연구성과를 <한국사>는 수렴해내게 되는 것이고, 다시 이것은 우리의 민족적 삶을 성찰하는 한 준거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주체적인 한국적 인문사회과학을 정립하는 토대를 우리의 <한국사>가 마련할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는 갖고 있다.
이 같은 지향과 실체를 갖는 <한국사>는 우리의 단독적 역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연히 동시대인들의 연대적 공동작업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한 시대 한 사회의 출판문화란 저자·출판사·독자의 수평적 연대작업으로 창출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근 힘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독자의 수용능력에 주목한다. <한국사>는 70년대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독자들의 축적되고 고양된 독서능력을 전제로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 민족적인 학문과 사상 내지 한국적인 인문사회과학의 대중적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사>는 우리 시대의 두 공동선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문제에 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공동참여에 의해 이루어졌다. 170여 명의 편집위원과 필자들이 서로의 관점과 연구결과를 주고받는 긴 토론과정이 집필시간보다 더 길었다. 방대한 주제와 연구영역, 다양한 지향과 연구방법으로 해서 역할분담과 상호토론을 거치지 않고는 <한국사>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8년에 걸친 작업 끝에 이윽고 간행되는 <한국사>는 4월혁명 이후 30여 년간 풍부하게 축적된 한국학의 총역량을 종합하는 우리 시대의 공동작업이지만, 한길사는 그것을 조직하고 뒷받침하며 연출해내는 보람과 긍지를 민족출판운동이라는 차원에서 보듬어 안을 수 있게 되었다.
기획하고 집필하고, 집필된 원고를 놓고 토론하고 점검하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편집실로 넘겨진 원고를 책이라는 문화적 형식으로 다듬어내는 일련의 작업은 우리에게 참으로 긴 인내를 요구했다. <한국사>를 기획해서 만들어내는 8년이라는 지난 세월은 편집위원이나 필자는 물론일 터이지만 출판사나 편집자들에게 참으로 가슴 벅찬 체험이었다.
이제 막 출간될 <한국사>지만, 우리는 <한국사>를 다시 만드는 작업에 임할 것이다. 역사란 이미 결정되어 있거나 정지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늘 새롭게 발견·해석된다. 역사란 역사적·사회적 실천에 의해서 기존의 이론과 학설이 수정·보완된다. 남과 북의 민족과 국토가 하나가 되면 '더 완전한 하나의 한국사'를 우리는 갖게 될 것이다.
이제 한국은 세계사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국제화'의 닻을 올리고 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국이 국제사회에 깊숙이 편입되고 또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총체성을 규명하는 <한국사>를 출간하는 일의 시의성과 중대성에 우리는 감히 자부심과 사명감도 가져본다.
아름다운 '우리의 책' <한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땀 흘린 편집자들과 미술가들, 제작자들이 또한 오늘의 기쁨과 긍지를 나눠 가져야 할 민족출판의 일꾼들이다. <한국사>라는 아름답고 진지한 민족출판을 위해 이들은 긴 인고의 작업을 출판문화의 무대 뒤켠에서 침묵으로 감당해주었다. <한국사>를 오늘 동시대와 동시대인들엔게 내놓는 우리는 참으로 즐겁다. 오늘같이 좋은 날을 위해 책 만드는 사람들은 존재해야 한다."
24장의 한국사 육성강의 CD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