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인정전. 현재의 건물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때 다시 지은 건물이다.이정근
이제야 궁 이름을 창덕궁(昌德宮)이라 명명했다. 궁궐 공사가 한창이던 2월에 찾아와 정전에서 집무를 보는가 하면 공사가 완공되기도 전에 환도하여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태종 이방원의 급한 성미를 알 수 있다. 궁 이름과 각종 전각 명칭을 지어놓고 경복궁 공사를 지휘하던 정도전과는 사뭇 다르다.
새로 지은 궁궐에서 축하연이 베풀어 졌다. 한양시대의 개막이다. 용상에 앉아있는 임금에게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를 올렸다. 이어 의정부찬성사 권근이 종친과 공신 그리고 육조(六曹)의 관료를 거느리고 헌수하였다. 권근이 화악시(華嶽詩)를 지어 올리고 이에 뒤질세라 하륜이 한강시(漢江詩)를 지어 바쳤다.
"한강물은 예전부터 깊고 넓으며 화악(華嶽)산은 푸르고 푸르도다. 한강은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화산(華山)은 울울(鬱鬱)하여 푸르고 성(盛)하니 우리 임금 오시는 길거리는 아름답고 백성은 즐거워서 노래하도다."
태상왕(太上王)이 마지막으로 개경을 출발했다. 태조 이성계가 임진나루를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태종 이방원은 양주에 나가 태조 이성계를 맞이했다.
"내가 양도에 내왕하느라 백성들의 생업에 지장을 주었는데 이제부터는 한군데 정해서 살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양도(兩都)란 개경과 한양을 이르는 말이다. 태조 이성계는 아들 방원에게 불만이 쌓이거나 부인 신덕왕후가 보고 싶으면 훌쩍 개경을 떠나 한양으로 떠났다. 자신은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새벽에 떠나고 밤에 들어 왔지만 그래도 백성들에게 폐를 끼쳐서 송구하다는 얘기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태종 이방원과 태조 이성계는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부자지간의 잠자리였다. 이튿날 태조 이성계의 행차가 노원역에 이르러 하룻밤 묵게 되었다. 행궁도 없고 객사도 없다. 노원 들녘에 막사를 치고 야영했다. 태상왕과 현존 임금이 천막에서 밤을 보낸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개경을 떠난 사흘째 되던 날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를 모시고 한양에 입성했다. 무안군 방번이 쓰던 집을 태상궁(太上宮)으로 정하고 들기를 권했으나 태조 이성계는 거절했다. 어디로 모실까? 방원은 난감했다. 태조 이성계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장막을 치고 기거했다.
창덕궁과 방번의 집으로 들지 않고 천막에 거처하는 태조 이성계의 의도는 '내가 들어가 살 궁실을 새로 지어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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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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