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렌트 버스트, 세상을 뒤덮는 녹색 물결

'죄많은' 인간에 대한 자연의 대처, <녹색의 왕>

등록 2007.05.28 10:22수정 2007.05.2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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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지구를 지배한 기간은 지구 전체에 나이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기간이다. 하지만 인간은 놀라울 정도의 그 짧은 시간 동안 지구의 생명을 끊임없이 갉아먹고 있다.

때아닌 폭염, 폭설, 폭우 등, 지구의 이상은 이미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제 빙하가 녹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확실히 지구는 심상치 않다.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를 일종의 유기적인 생명체로 바라보면서, "스스로 걷잡을 수 없는 위기에 처했다고 느낄 때에는 인간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가이아 이론'을 발표한 적도 있다. 물론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영원히 판정할 수 없는 일일 테지만, 일리 있는 이야기로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이아 이론'대로라면, 가련한 인간의 죄많음은 언젠가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 <드래곤 헤드>의 모치즈키 미네타로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 중 하나인 '공포'를 탐색하면서, 그 소재로 자연재해를 인용한 적도 있다.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 일어나는 등, 지구는 자신이 짜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인간을 '정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설, 영화, 만화 등, 인간의 죄를 꾸짖고 그에 따른 심판을 다룬 작품들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타카시게 히로시와 소가 아츠시는 '식물'을 소재 삼아, 인간이 처할 수 있는 미래를 그려나간다. <녹색의 왕>, 이 작품에서는 '식물'이 지구의 거대한 지각변동을 주도해나간다.

지구를 뒤덮은 '녹색', 생태계 유지의 주역은 식물?


<녹색의 왕>, 6권까지 출간
<녹색의 왕>, 6권까지 출간대원씨아이
<녹색의 왕>은 확실히 쉽게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지나치듯 봐서는 이해가 쉽지 않을 다양한 개념의 등장, 그리고 치밀한 이야기 전개 등, 단행본 발간 간격이 6개월 이상으로 늘어지는 이유가 괜한 것은 아닌 듯하다.

2015년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는 '플랜트 버스트'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식물이 이상할 정도로 맹렬하게 증식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에덴>이나 <북두의 권>이 다루는 세상이 다량의 핵미사일에라도 맞은 듯 폐허가 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더 진화된 설정이다. 거대한 빌딩도, 온 가족이 평온을 누리던 따뜻한 집도, 모두 찐득한 녹색이 달라붙어 버렸다.

'플랜트 버스트'와 함께 찾아온 개념은 '알레투사'라는 것. 일종의 움직이고 행동하는 식물이다. 만화에서는 '식물 괴물'로 묘사되면서, 줄거리 전개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소우마 켄'은 한 소녀를 구하다가 목숨이 위태롭게 된 동생 '소우마 신'에게 정체불명의 주사를 놓으면서, 동생을 '알레투사'로 변신시키는 것이다. 지구의 향방을 이끌어 갈 천재로 평가받는 그는 동생을 매개로 위험해 보이는 도박을 실천하는데, 만화는 이 '도박'을 핵심으로 다뤄나가는 것이다.

그는, "식물은 텔레파시를 다양한 물질을 매개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전자적 알레로파시(식물간 상호작용)를 인식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영향과 인식이 대사건으로 진화해 전자 레벨에서도 상호작용을 시작한다고 추측한다. 꽤 어렵다. <녹색의 왕>이 흥미로우면서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쉽게 이해 못할 주장들 중 가장 직접적이고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미생물과 식물, 동물 간의 생태계 먹이사슬 구조를 새롭게 해석했던 이야기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먹이사슬의 최정상에는 육식동물이 자리잡고 있지만, 그는 "식물이 먹이사슬의 최하층에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착각일 수도 있다"면서,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식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플랜트 버스트' 역시 성장이 아닌, 종 자체가 사라졌던 것 같은 동식물의 갑작스런 출현의 경우가 많았다는 이유와 함께, '식물 자체의 대응책'이라는 추측도 내린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좌지우지한 것은 '식물'이었으며, "자신을 위해 동물을 포함한 다른 생물 전체를 만들어 키우고 최고의 발달을 이룬 것일 수도 있다"는 재미있는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란 존재 역시 식물의 전략에 필요한 장기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보호받고 진화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인간이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그 외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무시하는 경우도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오만이, 지구를 가장 짧은 시간 동안 병들게 한 주범이라는 악명을 이끌어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지구가 주가 됐든, 식물이 주가 됐든, 중요한 것은 자연은 인간에 대한 나름의 반격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주어'가 바뀐다는 차이가 있을 뿐,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과 만화 <녹색의 왕>이 주장하는 '플랜트 버스트'는 비슷한 논리를 견지하고 있다. 나름의 생명과 지능을 가진 자연의 주체들이 인간을 몰아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폭넓은 지식과 상상력의 결집

앞서 이야기했듯이, <녹색의 왕>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화는 아니다. 미래에 대한 다양한 성찰과, '식물'을 소재로 한 흥미로운 지구의 가상 이변, 그 안에 내포된 독창적인 상상력과 토대. 다수의 독자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만화는 아니지만, 마니아층의 환호는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작품인 것은 확실하다.

'알레투사'가 돼 고난을 겪으면서 무거운 짐을 부여받은 '소우마 신'은 나름의 인정을 발휘하다가, 냉철하기 그지없는 형의 단호한 처사 덕분에 생명 유지 기간을 1년 이상 보지 못하는 '녹색의 몸(알레투사)'이 된 것이다. 수십억의 인간이 동시에 지은 죄를, 단지 인정을 발휘하려 했을 뿐인 이 소년이 모두 감당하게 된 것이다.

비극적인 운명을 떠안게 된 소년과, 그에게 의지하는 어린 아이들, 그리고 독창적인 세계관과 '식물 메카닉(?)' 등,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 단계를 거친다면,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듯 <녹색의 왕>은 그간의 걸작 애니메이션이 갖춘 요소들이 풍부하게 결합했으면서도, 이면에 깔린 상상력과 토대의 한계가 도대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없다는 장점도 숨어있다. 이런 작품이 풍성하게 발간된다면, 만화에 대한 인식 역시 또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물론 시각에 따라서는 골치 아픈 만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를 얘기하는 것, 특히나 암울한 미래를 얘기하는 것은 언제나 골치 아픈 일이다. <녹색의 왕>만이 떠안을 부분은 아니다.

간단치 않은 세상, 알 수 없는 인생, 그렇듯 우리가 맞부딪칠 미래는 험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험난할수록 정면으로 부딪쳐보는 것도 인간의 미래이고 운명이라 생각한다. 그 운명, 피하는 것이 지는 것이다.

우리가 지은 죄를 스스로 거둬들이며 갚아가는 것, 그것 역시 인간이 걸어야 할 예정된 미래는 아닐까. '알레투사'의 몸으로 운명과 맞서 싸우는 소년은 어쩌면 그 예정된 미래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녹색의왕 #만화 #일본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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