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이 11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이해찬 종리 주재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에서 논의된 황우석 교수 논문 조작사건에 대한 정부의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실 통폐합 방안에 대한 정부의 자평이 거창하다. 이름부터가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평가는 더 화려하다. "국가의 제도와 관행 하나를 정상화하는 일로, 선의를 가지고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왜 이제야 "선의"를 보이는 걸까? 그 좋은 "선진화 방안"을 왜 4년 동안 묵힌 걸까?
'개방' 부르짖다 '폐쇄'로 마무리하는 참여정부 언론정책
정부의 설명은 '진화'다. 개방형 브리핑제를 운영한 결과를 보완하는 차원이란다. 그러니까 "선진화 방안"의 단계적 확대 시행인 셈이다. 정말 그럴까?
개방형 브리핑제의 취지는 말 그대로 '개방'이었다. 일정한 요건을 갖춘 언론사의 기자라면 누구나 출입기자로 등록할 수 있었고, 출입기자는 누구나 자유롭게 브리핑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일부 언론사 기자들에 의해 폐쇄적으로 운영되던 기자실의 문을 열고, 정보의 독과점적 제공·취득구조를 혁파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확정한 기자실 통폐합 방안은 '폐쇄'를 핵심으로 한다. 누구에게나 문을 닫는 방안이다. 정부는 전자브리핑제를 도입하니까 정보제공 폭이 더 넓어진다고 주장하지만 말장난에 가깝다.
브리핑룸에서의 질의응답과 인터넷상에서의 질의응답의 차이는 소개팅과 채팅, 또는 맞선과 펜팔의 차이와 같다. 접촉면이 다르고 오가는 정보량이 다르다.
외양은 '개방'의 확대지만 실상은 '개방'의 후퇴다. "선진화 방안"의 단계적 확대가 아니라 "선진화 방안"의 단계적 축소다. 가속도를 붙이는 게 아니라 유턴하는 조치다.
주목할 현상이 있다. 똑 같다. 개방형 브리핑제를 도입할 때나, 기자실 통폐합을 확정할 때나 정부가 내세운 이유가 똑 같다. '담합'의 혁파다.
정부 vs 언론 전선 확대되자 들고나온 '배척정책'
노 대통령이 1월16일 지시를 내렸다. "기자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담합하는 구조"를 조사해 보고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온 게 기자실 통폐합 방안이다. 4년 전에도 그랬다. 일부 언론사로 국한된 출입기자들의 폐쇄적인 담합구조를 깨야 한다고 했다.
점검할 문제가 생겼다. 개방형 브리핑제를 도입해 기자실의 폐쇄적인 담합구조를 깼는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왜 또 다시 담합을 비판한 걸까?
일이 있었다. 청와대와 <경향신문> <한겨레> <한국일보>와의 논전이 있었고, 인터넷 매체의 청와대 비판 강도가 드세졌다. 청와대와 정부 입장에서 보면 악의·왜곡 담합구조가 한층 강화되는 양상이 빚어진 것이다. 이게 동기였다.
개방형 브리핑제를 도입하면 부산물을 얻을 수 있었다. 견제구도의 창출이었다.
'조·중·동'이나 그 견제 언론에 정보접근권을 동등하게 부여하는 건 당위명제다. 이 당위명제를 실천하면 보너스를 얻는다. 정보 해석을 두고 입장이 갈리고 갈린 입장이 서로 다른 주장으로 나타난다. 조·중·동이 주도하는 여론시장에 강력한 견제장치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왔다. 참여정부 비판 대열에 견제 언론이 가세하면서 청와대와 정부가 고립되는 현상이 빚어졌다. 조·중·동과 견제언론의 입장은 달랐으나 결과적으로 공격의 화살을 참여정부로 맞추는 건 매한가지였다. 분리해 견제하려고 했으나 비판이 통합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달가운 일이 아니다. 비판의 각도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참여정부의 정책 취지와 성과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모두가 무지한 언론이고 왜곡하는 언론이며 하이에나와 같은 언론이다.
이런 언론은 '사'다. 배척해야 할 대상이다. 방향을 '척사'로 삼는 건 당연하다.
'현장취재' 강조하면서 문 걸어 잠그는 정부의 자가당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