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99회

등록 2007.05.21 08:48수정 2007.05.21 08:48
0
원고료로 응원
84

새벽녘에 돌아온 능효봉과 설중행은 잠시 눈을 붙인 듯 아직도 졸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일행이라는 의식 때문에 제멋대로 늦잠을 자기는 틀린 노릇이었다. 억지로 식탁에 앉아 하품을 하는 모습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까지 식욕을 떨어뜨리고 있는 참이었다.


특히 함곡과 그의 동생 선화는 되도록 외면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중원사괴라 하는 인간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저 자식들이 어디를 다녀온 지도 대충은 짐작을 하고 있는 터였고, 알고 싶지 않아도 곧 알게 될 일이었다.

"목갑(木匣)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소."

입안의 음식을 대충 삼키고는 종문천이 입을 열자 함곡이 의외라는 듯 검미를 치켜세웠다.

"봉인(封印)은 함곡선생 부인이 보는 자리에서 함께 뜯어낸 것으로 그 안은 텅 비어 있었소."

당시 자신이 받은 목갑은 묵직했다. 분명 그 안에는 누군가와 약속이 된 물건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물론 보주가 보내온 목갑이었지만 그 안에는 보주가 보낸 물건이 아닌 다른 물건이 들어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자신을 비롯한 몇 몇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사실 보주가 보내온 목갑 때문에 좌등을 따라온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고 자신은 어쩔 수없이, 아니 반드시 운중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목갑은 어디 있소?"


무언가 생각난 듯 함곡이 불쑥 물었다. 묻는 함곡의 모습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종문천이 반문했다.

"빈 목갑이라 그냥 관 속에 넣어 두었소. 그것을 가져왔어야 하는 것이오?"

가져왔어야 한다.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의 전달이 만에 하나 잘못될 것을 고려해 전달자는 교묘하게 숨겨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목갑을 이중으로 만들어 빈 공간에 끼어 놓거나 아니면 목갑 자체가 전달할 물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내용은 필시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

"으음… 상만천의 손에 있겠군…."

신음과도 같은 탄식과 함께 함곡이 중얼거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풍철한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도대체 무슨 물건인데 그래? 보주가 보낸 것이라며?"

"으응…."

함곡이 다른 생각을 하는지 건성으로 대답했다. 함곡은 좀처럼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풍철한은 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역시 사람은 잘나고 볼 일이야… 나는 부르면서 그저 저 자식에게 오라는 전갈만 했는데 그래도 자네는 선물이라도 보냈으니 말이야… 사람 차별하나? 까짓것 어떤 건지 모르지만 잃어버렸다고 하나 더 달라고 해봐? 아니면 비슷한 것을 달라고 하든지…."

풍철한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하며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함곡은 그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보주가 준 물건인데 잃어버렸다고 하면 얼마나 서운해 하겠나? 나도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말이네…."

말과는 달리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보주가 보낸 물건이 무엇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보주가 자신에게 전할 물건은 누군가의 손에 있었고, 자신에게 전달될 물건은 그 누군가가 보낸 물건이었다.

그 내용이야 무엇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던 터. 다만 그것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게 되면 정말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풍철한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함곡이 알고 있을 것이란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단순히 선물 정도의 물건이라면 저렇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없지…. 잊어버리게. 나는 내 아내를 구해준 종대협에게 매우 감사하고 있네."

말과 함께 함곡이 애써 아무 일 없다는 듯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종문천이 갑자기 씹다 만 음식을 소리 나게 꿀꺽 삼키고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혹시… 목갑을 내버려두고 왔다고 그냥 말로 대충 때우자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묻자 함곡이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종문천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를 함곡이 아니었다.

"물론이오. 어젯밤 종대협이 한 가지 요구가 있다는 말씀은 잊지 않고 있소."

"요구가 아니라 부탁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소?"

사람을 구해놓고 와서는, 더구나 자신의 아내를 다른 이의 손에서 빼내온 사람이 부탁이라 한들 그것이 요구가 아니고 무엇인가? 강요와 다름이 없는 것이 아닌가? 여전히 함곡은 애매하면서도 조금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띠었다.

"물론 그 부탁이 무엇인지 들어보지 않아도 알고 있소.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것이 그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감정이 개입된 것이라…."

말끝을 흐리며 함곡은 슬쩍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는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분명 함곡의 눈길을 의식했음에도 선화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아마 자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니 어젯밤 종문천이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했을 때부터 그 부탁이 무엇인지 선화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불편하시다면 말씀 하지 않으셔도 될 거외다. 자자… 식사나 합시다."

풍철한의 눈빛이 갑자기 사납게 변하자 얼른 그 시선을 외면하며 종문천이 손을 홰홰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는 얼굴에 웃음을 과장스럽게 띠우고는 풍철한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소제는 이곳 명단에도 없이 숨어들어왔는데… 누군가 보면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오?"

풍철한이 그저 머리를 쥐어박아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생기기는 뭘 생겨? 내가 필요해서 불렀다고 하면 그만이지."

"하…! 형님 위세가 그리 대단하오? 말 한 마디로 해결할 수 있다니…."

"이게 그냥…?"

한대 쥐어박을 듯 팔을 들려하자 종문천이 목을 움츠리며 손을 내저었다. 풍철한의 위세가 아니라 실상 조사를 위해 형제를 불렀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풍철한이 들어올 때부터 나머지 형제가 들어올 것이라 모두 예상하던 터였다.

"아… 말로 합시다. 이제 소제도 나이 사십 줄에 들어섰는데 툭하면 손찌검을 하려하니… 이거 어디 서러워 살겠소?"

종문천의 장난스런 말에 모두들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풍철한 만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종문천을 노려보았다. 종문천은 놀리듯 아예 풍철한의 시선을 외면하며 싱글거렸다.

"그건 그렇고…."

찻물로 입안의 음식을 씻어내면서 입을 뗀 함곡이 풍철한 쪽을 바라보았다.

"오늘 있을 좌총관과 철교두의 숭무지례 결과가 어찌될 것 같은가?"

"글쎄…?"

풍철한은 입안의 음식을 모두 삼키면서 잠시 생각하는 척 했다. 함곡이 묻는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철교두가 그리 강한가?"

함곡이 되묻자 이제야 감을 잡았다는 듯 풍철한이 느긋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승부의 결과보다는 좌등을 걱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식으로 묻지 않았을 것이다.
#이웅래 #천지 #풍철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3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4. 4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5. 5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