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94회

등록 2007.05.14 08:26수정 2007.05.1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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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야?"

능효봉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묻자 설중행의 시선은 귀산 노인에게 돌려졌다.


"저는 도대체 운중보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뜸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가지고 이리저리 돌려 물어보는 것도 귀산 노인에게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얄팍한 짓일 터였다. 더구나 갑자기 운무소축 이야기가 나오자 애써 눌러놓았던 의문이 불쑥 솟구쳤던 것이다.

자신을 알고 싶으면 들르라던 우슬의 말이 항상 그의 고막을 간질이고 있었다. 반드시 운무소축은 한 번 더 찾아가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귀산 노인은 운무소축과 심상치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그라면 분명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젊은 것들이 못된 것은 금방 배운단 말이야…."

아마 조금 전 협박 아닌 협박으로 기어코 묵룡검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낸 능효봉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능효봉은 슬쩍 무안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갑작스런 설중행의 물음에 오히려 내심 당혹스런 느낌이었다.


"몰라… 모르는 것은 모르는 거야…."

귀산 노인은 드러눕는가 싶더니 몸을 벽 쪽으로 홱 돌렸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모르는 분이 이곳을 쫓겨나가는 저보고 다시는 돌아올 생각을 말라고 하셨습니까? 정말 모르면서 제가 돌아오면 모두가 불행해진다고 하셨습니까?"

- 차라리 잘된 일 일게야.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모두 알 필요는 없지. 모르는 게 편해. 하여튼 다시 이곳에 돌아올 생각은 버려라. 네 놈이 돌아오면 모두가 불행해져. 아니 네 놈이 자의든 타의든 이곳에 돌아온다면 이미 불행해져 있을 게야. -

설중행이 운중보에서 쫓겨나가기 며칠 전에 처연한 눈길로 해 준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맞는 것 같았다. 조용하던 운중보에 갑자기 사건들이 터지면서 흉험한 곳으로 변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곡을 찔렸음인가? 그 말에 귀산 노인의 움직임이 잠시 굳어들었다. 설중행이 잊어버리기를 바랐지만 기억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조금 지난 후에 귀산 노인이 잔기침을 하더니 말을 툭 던졌다.

"노부가 그런 말을 했어? 나이를 먹으면 기억력이 없어져…."

말이 안 되는 변명이란 것은 귀산 노인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었다. 설중행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귀산 노인은 슬그머니 돌아 방향을 돌려 설중행 쪽으로 돌아누웠다.

"빌어먹을… 말하기도 귀찮아… 저 궤짝을 뒤지면 아래쪽 근처에서 십삼책(十三冊) 사권(四券)이 나올 거야. 그 중간 쯤 보면 있을 거다. 노부도 확실히 아는 것은 아니야. 그저 짐작일 뿐이지. 물증도 없는 그저 돌아가는 것을 보고 그럴 거란 추측을 했을 뿐이야."

말을 하는 중간에 설중행은 벌써 귀산 노인이 운중보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기록하고 있는 인명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서둘러 마구 뒤지자 귀산 노인이 빽 소리를 질렀다.

"조심스럽게 다뤄! 네놈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지 몰라도 노부에게는 소중한 것이야."

그 말이 끝내기 전 설중행은 어느새 귀산 노인이 말한 것을 꺼내들고 있었다. 설중행이 탁자 위에 놓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자 능효봉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갔다.

-- 성명 : 설해운(雪解雲), 본명이 아닌 법명(法名)으로 보임.
출신 : 아미파 화부였던 설가(雪家)의 자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아닌 것으로 보임. 아미파의 추천으로 입보. 아미파의 주요인물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됨.
성격 : 느긋하고 낙천적임. 장난치기를 좋아하나, 의외로 어린애답지 않은 무서운 집중력을 가지고 있음. 나태하고 게으른 아이 같으나 한 가지 일에 빠지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집착을 보임.
수학 : 아미파에서 기초무공을 익힌 것으로 보이며 본 보 교두들은 겨우 진도를 따라오는 정도로 평가하고 있음. 소림의 권각법에 관심이 많고, 아미파의 무공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음.
특징 : 보주와 관련 있는 아이로 보임. --***--
입출 : 7세에 입보하여 13세에 징계를 당하고 강제로 출보 시킴.


간단했다. 너무나 평이하여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허나 문제는 보주와 관련이 있다고 기록한 특징 뒤에 세줄 정도의 알아볼 수 없는 글인지 기호인지 모를 것이 기재되어 있는 점이었다. 분명 기록한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음호일 터였다.

'보주와… 관계가…? 내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충격은 충격이었다. 자신이 보주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물론 화부의 자식으로 아미파가 자신을 천거했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또한 자신이 생각해도 특출 난 아이는 아니었음에도 교두 중 한 명이 보주께서 주시하고 있다는 말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것이 단지 더욱 열심히 수학하라고 던진 말이 아니었던가?

"이건 무슨 의미요?"

남긴 음호를 묻는 것이리라. 귀산 노인으로서도 이미 물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 설중행의 시선 뿐 아니라 능효봉 역시 호기심을 지우지 못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귀산 노인에게 던졌다.

"이십육 년간의 인명부에는 몇 군데 그런 것이 있다. 언제나 객관적이고 확인된 사실을 기록해야 올바른 역사가 되는 게야. 하지만 확인되지 못하는 부분은 그렇게 해놓았다. 남들이 오해할 수 있는 것은 특히 그랬지."

설중행의 예상은 맞았다. 그의 추측을 기재할 때는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음호를 사용했다는 말이다.

"알려 주시오."

설중행이 나직하게 부탁하자 귀산 노인은 한숨을 불어냈다.

"이제 와서 숨길 것도 아니지. 어쩌면 네 녀석이 보주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이다. 보주가 군산혈전을 끝내고 일년 동안 강호행을 할 때 아미도 들렀었거든. 아미 누군가의 몸에 씨를 뿌린 것이 아닐까 라는 내용이다."

"아들? 말도 안 되는…."

경악이나 충격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자기의 자식을 왜 그리 버려두었단 말인가? 아니 운중보로 불러들인 자식을 어찌하게 내팽겨 쳤단 말인가?

허나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설중행의 가슴에 밀려들었다. 왜 보주는 남들 몰래 두 가지 무공을 전해준 것일까? 그리고 운중보를 쫓겨난 직후 자신을 거두어준 사부는 어떻게 보주가 알려준 그 두 가지 무공을 알고 있었으며, 오년 동안 그리도 다그쳤던 것일까? 결국 냉정하게 비영조에 투신하도록 종용하고 떠난 사부는 과연 누구였을까? 보주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던가? 더구나 왜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는 회운사태의 눈길은 애처로움이 담겨 있었을까? 갑자기 여러 가지 상념이 불쑥 솟구치며 그의 뇌리를 빠르게 헤집고 있었다.

"말이 안 되는 것은 맞아… 입증할 아무런 것도 존재하지 않거든… 헌데 더욱 재미있는 일은 네 녀석이 나가고 일년쯤 지난 후에 노부가 은근히 보주에게 물어보았지. 혹시 보주의 아들이 있지 않냐고…."

"……!"

마른 침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 때만큼은 능효봉도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긴장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없다고 하더군. 씁쓸히 웃으며 아들 하나 가지기를 그렇게 원했는데 이루지 못했다고… 몰라. 그 말이 정말인지는… 하지만 적어도 거짓 같지는 않았어. 만약 보주의 태도가 조금만 이상했다면 노부는 네놈이 정말 보주의 아들이라고 확신했을 거야."

아직까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귀산 노인은 몸을 비스듬히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보주는 네 녀석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을게야. 우슬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거든. 하필이면 저런 멍청스런 사람이 자신의 배필이냐고… 너를 가리킨 말이었어. 이젠 더 이상 나도 몰라. 이제 더 묻고 싶으면 보주나 우슬에게 가봐. 아니지?"

그러더니 시선을 돌려 능효봉을 바라보았다.

"너도 알 것 같은데? 아니야?"

갑작스런 질문이어서인지 능효봉의 얼굴에 미세하지만 당황스런 빛이 스쳐지나갔다. 자신의 내심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은 그가 순간이나마 그런 기색을 보였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허나 그것은 순간이었고,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능청스런 미소를 띠었다.

"귀신도 탄복케 한다는 추숙이 모르는 일을 내 어찌 알겠소?"

잠시 무어라 말할 것 같이 입을 우물거리며 능효봉을 바라보던 귀산 노인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알았어! 능글맞은 자식… 네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귀산노인은 정말 능효봉이 꼴도 보기 싫은지 반쯤 일으켰던 상체를 누이고는 벽 쪽으로 홱 돌아누웠다. 왜소해 보이는 귀산 노인의 등이 허전해 보이기도 하고 완강해 보이기도 했다.
#연재소설 #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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