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93회

등록 2007.05.11 08:11수정 2007.05.11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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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산 노인의 표정을 보니 조금 화가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제야 능효봉은 침상에 걸터앉으며 능글맞게 물었다.

"많이 다치셨소?"


"보면 몰라?"

그러자 귀산 노인은 짐짓 화가 난 듯 소리쳤다. 능효봉이 어이없다는 듯 침상에 앉아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귀산 노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랬소? 왜 나한테 화풀이요? 그렇다고 추숙하고 하루 종일 붙어있을 수도 없고… 더구나 귀찮다고 하지 않았소?"

"내가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표정이구나… 못 된 녀석…."

혀끝을 차며 귀산 노인이 욕해도 능효봉은 별 상관 하지 않았다. 의례 욕을 하려면 하라는 식이었다. 능효봉은 더욱 능글맞게 귀산 노인과 같은 자세로 비스듬히 상체를 벽에 기대면서 물었다.


"누구요?"

"뭐가?"


귀산 노인이 뭔 말인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묻자 능효봉이 턱으로 건번의 복부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묵룡검에 의한 것 맞소?"

"눈은 삐지 않았구나."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구룡 중 셋째인 묵룡의 독문검인 것을…. 구룡 중 검을 쓰는 인물은 유독 묵룡 한 사람뿐이었다. 검법을 익혀도 검이 없으면 제 위력을 다 발휘할 수 없다는 묵룡의 절기. 운중보 내의 누군가가 묵룡의 절기를 익히고 그 독문무기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나 아니더라도 추숙 도와주는 사람이 많구려… 뭐? 굳이 내가 호위 노릇을 하지 않아도 이리 아무 때나 나서주니 말이오. 더구나 묵룡검이라니? 그래서 무공도 익히지 않은 추숙이 그렇게 큰 소리를 쳤구려."

"누군지 알고 싶지?"

귀산 노인이 능효봉의 약을 올리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나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자신을 놀리려는 귀산 노인의 술수에 말려 웃음거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더구나 능효봉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알고자 한다면 조만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한번 선보인 이상 또 다시 나타날 것이다.

"뭐 굳이 가르쳐 준다면야 좋지만 사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

"그럼 말아. 사정을 해도 가르쳐줄까 말까 한데… 저 시체나 깨끗하게 치워."

귀산 노인의 말에 능효봉이 무슨 소리하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일 저지른 놈한테 치우라 하시오? 내가 뭐 장의(葬儀)줄 아오? 신경질 나는데 저 시체를 추 태감에게 보내 줄까 보다."

심통을 부리듯 능효봉이 말하자 귀산 노인이 소리를 지르려다말고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응?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아주 재미있겠어."

은근히 억장을 지르고자 한 소리인데 귀산 노인이 그렇게 나오자 능효봉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의도로 그러는 것일까? 건번이 죽은 것을 보면, 더구나 이십육 년 동안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묵룡검의 상흔이 적나라하게 나타나있는 시신을 가져다주라니?

"누구 맞아죽는 꼴 보려고 그러오?

괜히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오히려 귀찮은 일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때? 그냥 청룡각 앞에다 던지고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가면 되잖아? 그저 소리 나게 던지면 자연 나올 것이고 누군가 문 열고 나올 즈음이면 이미 네놈은 잠자고 있을 것 아니야?"

"죽은 놈 들쳐 메고 싶지 않소."

"저 자식 있잖아. 그만큼 해주었으면 부려먹을 만도 하잖아?"

턱으로 설중행을 가리켰다. 설중행은 이미 탁자 옆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시선 역시 건번의 복부에 고정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위력을 가진 검이기에 저런 끔찍한 상처를 남기는 것일까?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저 자식이라고 하기 좋겠소?"

"네가 하든 저 놈을 시키든 여하튼 해!"

능글거리며 빠져나가려고 하자 귀산 노인이 못을 박듯 말했다. 능효봉이 갑자기 말을 돌렸다.

"누구요?"

"아주 궁금해 미치겠지?"

"나 그냥 일어서 갈 거요."

은근 슬쩍 협박이었다. 협박을 두려워할 귀산 노인도 아니었지만 자신도 이야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고 있는 참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
"없소."

잠시 청각을 높여 주위를 살피던 능효봉이 고개를 끄떡이자 귀산 노인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운무소축!"
"우슬?"

"아니… 우슬 그 아이가 묵룡검 같은 것하고 어울리기나 해?"
"그럼 무화? 어쩐지… 저 녀석이 쩔쩔 매더라니…."

의외였다. 그 말을 들은 설중행 역시 매우 놀라웠다. 묵룡검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어렴풋이 듣기는 했었다. 하지만 상흔을 막상 보니 그것은 상상보다 훨씬 무서운 무공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무공을 그 여인이 익히고 있었다니….

"이제 자야겠어. 말해주었으니 빨리 저 놈의 시체나 가져가."
"정말 갖다 주라는 거요?"

"그런 내가 농담하고 있는 것 같아?"
"괜찮겠소?"

건번은 귀산 노인을 처리하러 왔다. 그런 그가 시체로 돌아간다면? 더구나 시체를 보란 듯이 청룡각에 가져다 놓으면 그들이 가만있겠느냐는 뜻이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이제 비켜… 누어야겠어."

능효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엉거주춤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지만 다 생각이 있어 시키는 일일 것이다. 어차피 시체를 보내든 아니든 건번이 돌아가지 못하면 눈치 채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야… 들어…."

능효봉이 설중행에게 다가가며 턱으로 건번의 시신을 가리켰다. 설중행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싫소. 나도 뭐 얻는 게 있어야 일을 해줄 것 아니오?"

다소 돌발적이고 엉뚱한 설중행의 반응에 능효봉은 물론 힘겹게 드러눕던 귀산 노인도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래도 심각한 것은 아니었고 마치 투정부리는 것 같은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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