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용 상사의 근무시절.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박 상사.박정용 상사의 딸 제공
우리 회원 중에는 부친께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빨치산 대장 남태준을 생포했던 용감무쌍한 박정용 상사의 따님이 있다. 박 상사는 기술이나 병참 관계부대에서 근무한적 없이 초지일관 전투부대에서만 복무하여 연대 주임상사 직에 올랐다. 박 상사의 딸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멋있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군부대에서 보내다시피 했다 한다.
그러나 점점 철이 들어가면서 아버님의 존재가 너무나 불쌍하고 초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계급이란 게 뭔지 모르지만, 왜 우리 집의 기둥이신 하늘같은 나의 아버지가 새파랗게 젊은 장교들한테 반말을 들으며 쩔쩔매고 때때로 야단맞고 기압을 받아야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버님은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 전투도 많이 하신 애국자이신데 애송이들이 함부로 하는 것을 볼 때는 가슴에 분노가 치밀기도 했단다.
어쩌다가 영관 계급장을 달고 있는 장교들을 보았을 때는 그들은 그냥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별종의 우러러 봐야하는 특별한 존재들인 것으로 알았었다고 한다.
학교 갔다가 비가 오는 날이면 장교분의 아이는 지프차가 와서 실어 가는데 박 상사는 우의를 입고 비를 맞으며(군인은 우산을 쓰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음) 우산을 들고 와서 딸아이에게 주었다 한다. 철 몰랐던 소녀시절 박 여사는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당당하던 아버지가 오히려 너무나 처량하고 창피했다고 한다.
박 상사는 일생동안 고락을 함께하며 의지해왔던 부대에서 쫓겨나다시피 24년 6개월 만에 정년퇴직을 했다.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해 다른 곳으로 갈수도 없고 해서 그냥 부대 앞 살던 집에 눌러 앉아 살았다고 한다.
박 상사는 아침 기상나팔이 불면 실성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부대 쪽을 향해 정좌하여 함께 점호를 하는 등 그의 마음은 한시도 부대를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부대 안에 내가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 있을까 의아히 생각하는 듯 늘 초조한 모습으로 담배를 연거 피우고 거의 날마다 술을 마셨다.
그는 지나온 과거를 가끔 후회하며 몹시 취해있을 때는 무덤에 갈 때까지 숨겨가야 할 말을 털어 놓았다고 한다. 공비토벌 시 민간인 학살의 임무를 수행했던 일을 자책하다가 두려움에 쫓기듯 멈추곤 했다고. 사실 말단에서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던 분들은 철저히 이용만 당하고 이렇게 내팽개쳐지고 상급 장교들은 계속해서 진급 출세해 떵떵거리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할 수 있다.
박정용 상사는 결국 부대 앞의 그 고단한 집에서 천대받았지만 당당했던 일생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부대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 따라 부대 곁에 있는 공동묘지에 찾아오는 이 별로 없이 쓸쓸히 장사를 지냈다.
사라진 박 상사의 화랑무공훈장과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