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선사가 기거하며 차를 중흥시킨 일지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조선후기 최고의 석학들이 교유했던 곳이기도 하다.정윤섭
대흥사는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추구하며 차를 중흥시킨 초의선사가 그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차를 매개로 하여 이러한 교유를 가능하게 하였지만 이를 통해 유학과 불교가 사상적으로도 교유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마디로 대흥사는 18세기 이후 학문과 예술의 중심 도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처럼 유배라는 정치적 이유로 인해 이루어진 교유에 비해, 이 지역 토착 양반사대부라고 할 수 있는 해남윤씨가도 대흥사와의 오랜 인연의 끈이 맺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산 윤선도를 비롯한 해남윤씨가의 인물들이 대흥사와 다양한 교류를 가졌음을 여러 기록과 작품 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는 철저한 유학자 집안이지만 가학(家學)의 경향이 사뭇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어초은 윤효정대 에서부터 시작되어 고산 윤선도대에 그 가풍을 확립한 해남윤씨가는 박학다식(博學多識)이라는 매우 기능적이고 실용적이며 또한 현실적인 학문관과 생활관을 가짐으로 인해 편향된 학문이나 사상 속에 안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후기 공재 윤두서를 대표로 하는 실학적 학문경향과 예술활동 등 다양한 학문을 받아들이고 섭렵하고자 하였던 집안의 학풍에서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대흥사와 인연이 깊었던 정약용은 공재 윤두서의 외증손으로 녹우당 해남윤씨가는 외가라는 점에서도 이러한 친밀함을 엿볼 수 있다.
고산의 대흥사와의 인연
고산은 조선 시가문학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듯이 문학적 업적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불가적 성격의 시를 여러 편 남기고 있다. 고산의 한시는 불교사상이 깊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불교의 서원사상(誓願思想)이 들어 있어 고산은 불교를 일방적으로 배척했다기보다는 공존공생을 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대둔사지>에는 고산이 해남에 있을 때 대흥사를 왕래하며 대흥사를 노래한 시가 있다.
누대(樓臺)사이로 산허리가 둘렀는데
청경(淸磬)은 먼 곳까지 쨍그랑거린다.
소객(騷客)이 지팡이 놓고 다리에서 쉴 제
진금(珍禽)은 새끼와 함께 물위를 스친다.
바위틈에 달이 질때 빗방울 내리고
상방(上方)의 스님네는 명연(暝烟)에 잠긴다
그 누가 방훼(芳卉)를 공곡(空谷)에 남겨두어
뜨락에 규화(葵花)와 저녁노을을 다투게 하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