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형식의 모란도유연준 촬영
연재를 시작하며 어떤 주제부터 이야기를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림의 역사 역시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터라 소재는 많거든요. 또 시대에 따라서 좋아하는 그림의 종류도 다르지요. 하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소재도 있습니다. 바로 꽃이에요. 물론 꽃도 많지요. 봄의 매화로부터 시작해서 가을의 국화, 겨울 동백꽃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으뜸은 모란입니다. 햇빛 찬란한 5월에 정원에 활짝 피어난 모란을 보고 있으면, 달리 이유를 달지 않아도 모란이 꽃의 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귀(富貴)와 풍요(豊饒)를 상징하는 모란은 그래서 부귀화(富貴花)라고도 부릅니다.
중국에서는 재산이 많고 신분이 높은 것을 부귀라고 하는데, 모란은 그 모양이 풍염(豊艶)하고 품위와 위엄이 있다 하여 부귀화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화중왕(花中王), 천향국색(天香國色), 귀객(貴客), 화신(花神)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지요. 꽃이 크고 화려해서 호사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화왕(花王) 또는 화중왕(花中王)이라고도 부릅니다.
천향국색이라고 말하는 것도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향기와 나라에서 최고 미인과도 같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국인들은 모란을 사랑하여 모란꽃 아래서 죽는 것을 일종의 지극한 호사의 풍류로까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중국 사람들의 모란 애호는 대단했다고 해요. 중국에서는 지금도 모란 재배가 인기여서 양자강 이북 지방에서는 훌륭한 모란원이 많다고 합니다.
원산지가 중국인 모란은 붉은색, 자주색, 흰색, 분홍 등의 빛깔을 띱니다. 봄이 거의 지나고 여름이 올 무렵인 5월에 피는 꽃이지요. 꽃의 지름이 거의 15-20㎝에 이를 정도로 큰 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구름처럼 핀 꽃은 그래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다른 꽃들보다 크기도 크려니와 윤기가 나는 색은 정말이지 매력적이거든요.
우리나라에 모란이 언제 전해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어 추측해볼 따름입니다. 신라의 선덕여왕과 관련한 것이지요. 일연의 <삼국유사>에 담겨 있는 이야기입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빨강색, 자주색, 흰색의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각각 한 되씩 신라에 보내왔는데 나중에 선덕여왕으로 즉위하는 덕만공주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꽃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모란꽃 그림에 벌과 나비를 함께 그리지는 않으며, 그래서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모란에 향기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심어서 꽃을 피워보면, 없기는커녕 아주 매력적인 향이 있습니다, 그리 진하지는 않지만 깊고도 그윽한 향기가 풍기지요. 모란꽃은 분명히 향기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벌과 나비가 날아듭니다.
고려시대 이인로(李仁老)는 '미개모란'(未開牡丹)이란 시에서 "봄추위가 동산에 꽃피는 것을 억제하니 춤추는 나비와 노니는 벌이 그리워한들 무엇하리"라고 하여 모란꽃에도 벌, 나비가 날아들 수 있음을 읊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시에서는 일반적으로 매화 향기를 암향(暗香)이라고 하고, 난초의 향기를 유향(幽香)이라고 하며, 모란의 향기는 이향(異香)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나라에서 온 그림에 곤충을 그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모란꽃에는 곤충을 같이 그리지 않는 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모란꽃은 영원한 부귀를 의미하는데, 나비는 질수(耋壽·80세)를 뜻합니다.
나비를 그린다면 80세까지만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의미로 해석되니, 80세까지만을 뜻하는 나비를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에서는 이러한 그림 속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고, 그 결과 모란꽃에는 향기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지요. 그리고 모란의 씨를 심었더니 정말 향기가 없더라는 말도 호사가들이 꾸며댄 말일 수 있습니다.
또는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기 위한 육종 과정에서 꽃은 크고 색깔은 화려하면서도 향기까지 높은 것은 배합해내지 못해서 향기 없는 꽃이 핀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