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에 참여만 판사 명단을 공개한 <한겨레신문> 1월 30일자.
부질없는 일이 됐다. 논점은 '하느냐, 마느냐'였다. 하지만 오늘부로 이 논점은 의미를 잃어버렸다. <한겨레>가 해버렸다.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에 참여한 판사 492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논점 이동은 불가피하다. '하느냐, 마느냐'라는 정당성의 문제가 '왜 하느냐'는 정치 문제로 비화되게 됐다.
조짐이 있다.
<조선일보>는 "(진실화해위원회)보고서에 작성된 판사 명단이 이미 일부 언론사에 유출된 상태"라면서 "판사 명단이 공개되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한 판사의 말을 전했다.
<중앙일보>는 대법원의 반발을 전하면서 정치성에 방점을 찍었다. 이런 내용이다.
"정치적 악용의 소지가 있을 때 하기는 어렵다.…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는 더욱 힘들다."(이광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
"(사법부의)과거사 정리작업은 사법부를 놓고 편가르기하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 안정된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변현철 대법원 공보관)
이들이 우려하는 '정치적 악용 소지'는 뭘까? 편가르기다. 판사 명단이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구획선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특히 이런 편가르기가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점이 더 큰 문제라고 한다.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 참여 판사 명단 공개, 과연 정치적일까
가정해 보자. 이들의 우려는 어떤 모습을 띠고 나타날까? 이런 경우다.
첫째, 판사 명단 공개로 사법부를 압박함으로써 대선 지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형사건에서 '코드 판결'을 유도하는 경우다.
어떤 게 있을 수 있을까? 별로 없다. 정치권이 연루된 대형 사건이 별로 없다. 설령 그런 사건이 있더라도 높은 분이 연루된 사건은 대부분이 불구속 사건이다. 재판부가 맘만 먹으면 심리기간을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
둘째, 판사 명단 공개가 특정 대선후보의 입지를 흔드는 경우다. 에둘러 갈 것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정치적 타격을 입는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가능성이 없다. 긴급조치 그 자체에 대한 조명이라면 몰라도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에 참여한 판사 명단을 공개한다고 해서 박근혜 전 대표가 치명타를 맞는 건 아니다. 이미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 결정이 내려진 마당이다. 판사 명단 공개는 축에도 끼지 못한다.
셋째, 판사 명단 공개가 사법제도 개혁에 대한 여야의 입장차를 증폭시킴으로써 대선 국면을 조정하는 경우다.
이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장 인준 문제를 놓고 수개월 동안 대치했던 여야다. 사법제도 개혁안은 여야간, 의원간 입장차로 아직도 처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사법제도 개혁안은 사법부만을 겨냥한 게 아니다. 범-검-경을 두루 아우르는 개혁안이다. 그래서 사법제도 개혁안을 둘러싼 갈등이 법원과 검찰, 검찰과 경찰로 나뉘어 다면적으로 전개됐었다. 판사 명단 공개와 사법제도 개혁안을 직결시키는 건 비약이다.
거꾸로 볼 필요가 있다. 판사 명단 공개의 정당성이 문제가 아니다. 그 적합성이 문제다.
판사 명단 공개를 반대하는 신문이 입을 모아 한 얘기가 있다. "(관련)자료는 정부의 기밀사항이 아니며 일반인도 얼마든지 정보공개를 요구해 열람할 수 있는 내용"(조선일보)이라고 했다.
맞다. 얼마든지 열람할 수 있는 내용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공개하는 게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논리도 성립된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될 일, 진실화해위원회가 대신 해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시비를 걸 거면 공개 그 자체가 아니라 공개 방식과 요건을 문제 삼는 게 타당하다.
법원 판결내용을 공개하는 데에는 일정한 요건이 있다. 사건 개요와 판결 내용, 그리고 담당 판사 이름 등이 적시돼야 한다. 그래야 담당 판사가 사건에 대해 합당한 판결을 내렸는지를 사례별로 검증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이 아니라 단지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에 참여한 판사 명단만 공개하면 그건 몰아가기에 해당한다.
다행스럽게도 진실화해위원회, 그리고 <한겨레>가 그런 우를 범한 것 같지는 않다. <조선일보>가 전한 바에 따르면 진실화해위는 "사건 개요와 판결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서 그 안에 담당 판사 이름이 들어가는 형식"을 택했다고 한다. <한겨레>도 사건 발생날짜와 사건 개요, 형량, 재판관을 표로 만들어 공개했다. 문제될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