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잡이와 고구마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개도 모전마을김준
섬으로만 이루어진 '화정면', 개도는 그중 가장 큰 섬이다. 천제산과 봉화산 골을 따라 골골이 화산, 여석, 월항, 모전, 호령, 신흥 등 여섯 개의 크고 작은 마을들이 똬리를 틀었다. 여수에서 가장 큰 섬은 말할 것도 없이 육지로 변한 돌산이다. 다음이 금오도, 그 뒤를 이은 섬이 개도다. 가막만과 여자만의 길목에 떡하고 자리를 잡은 개도는 순천만과 합류지점에 위치해 있다.
개도는 가막만의 문을 굳게 빗장 걸고 여자만을 넘어 거문도로 열린 큰 바다를 넘본다. 가막만과 여자만은 바다라기보다는 호수에 가깝다. 고흥반도와 화양반도, 여수반도가 감싸고 낭도, 개도, 금오도, 돌산도가 징검다리처럼 바다에 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섬들을 연결해 다리를 놓을 계획이라고 한다. 섬주민들의 입장에서 불편한 뱃길보다 편리한 찻길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냉큼 두 손을 들어 환영하기 어렵다.
다리가 섬사람보다는 육지 것들이 편하게 들어와 쉽게 나갈 수 있도록 놓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인근에 작은 섬을 거느린다고 하여 덮을 개(蓋), 개도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이동예라는 사람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전한다.
개도만이 아니라 서남해역의 대부분 섬들은 여말선초에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에 따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본격적으로 섬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명나라의 해금정책을 모방한 공도정책은 고려말에는 서남해 해상세력과 왜구 등과 연대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고, 조선초에는 법률로 금지했다. 그래도 몰래 들어가 섬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간섭이 없는 섬이야 말로 지상낙원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관의 허락없이 들어간 자에게는 장 100대의 형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