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두번 열리는 바닷길에 의지해 오가는 웅도로 가는 길박상건
측도와 비슷한 생활을 하는 곳이 55가구에 주민 180여 명이 사는 충남 서산의 웅도이다. 이곳 역시 하루에 두 번씩 열리는 물길에 따라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해남 땅끝을 더 지나면 해남군 남창리. 작은 방조제로 달도와 연결돼 마지막 육지이다. 이곳 달도에서 완도군을 잇는 다리가 완도교이다. 1968년 한강 인도교를 철거해 완도대교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완도와 연결돼 서울 혹은 광주에서 완도까지 국도 13호선을 타고 달려 고속버스가 완도항까지 닿게 된 것이다.
이 다리가 연결되기 전에는 기상예보에 배가 뜨지 못해 200미터 남짓한 바다 거리에서 서로 손을 흔들며 뒤돌아서던 풍경들이 옛 완도 섬사람들의 설날 풍경이었다. 그러나 완도는 201개의 작은 섬을 보듬고 있다. 이 섬에서 201개 섬을 오가는 사람들은 다시 배를 타야 한다.
완도토박이 김정호(45, 완도신문 편집인)씨는 "설날 풍경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실 읍네 학교를 다니던 고마도, 사후도, 모도 등 작은 섬에서 사선을 타고 학교 다니던 친구들은 바람이 불면 마을에서 오고가던 연락선이 출항하지 못해 학교에 나오지 못한 것이 다반사였다"면서 "그런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애환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완도, 신안, 진도 등 크고 작은 섬 지역에 연륙교가 많이 늘어나면서 성수기에는 민박집 등 관광수요가 줄어서 걱정이고, 그렇다고 연륙교가 생기지 않으면 섬사람들의 고향을 찾는 길이 불편하니 이도저도 문제인 것이 섬사람의 생활 문제라는 것이다.
어쨌든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귀성길은 행복한 것이다. 그렇게 찾아간 섬마을 고향집에는 그런 그리움을 품은 듯 객지 사람들의 편린처럼 오래도록 묵히고 익히는 상징물이 있었으니 그것이 장독대이다. 작은 항아리는 노잣돈을 보관하기도 했고 할머니 어머님, 고모네들이 밤새 콩을 삶고 절구통에 빻아서 담은 된장과 메주와 함께 발효시킨 검은 간장이 출렁이곤 했다.
가난한 시절 저녁상은 늘 밀죽이었는데 먹다 남은 밀죽은 늘 그 장독대 위에 놓여 있었다. 다음날 아침 팥이 들어간 그 식은 밀죽을 먹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요즈음 도시에서 파는 칼국수에만 입이 길들여진 사람들은 어머니 손맛이 깃든 기 밀죽의 참맛을 잘 모를 것이다.
장독대 옆에는 장두감나무가 있었다. 아직 설익어 된장 풀어 담가두면 이삼일이면 잘 익곤했다. 또한 장독대 앞에는 샘물이 있었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수막을 달아놓으면 냉동고 역할을 했고 논밭 일을 하고 온 장형의 등물을 끼얹던 추억이 배어 있는 곳이다. 그 뒷편으로 나무를 쌓아두는 곳 그리고 건너편에 텃밭이 있었다. 그 텃밭 가로질러 신작로가 있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자식들을 고대하며 연신 이마에 손을 얹고 그리움을 달랬다.
신작로는 그런 그리움을 물고 꼬불꼬불 이어졌고 비틀거리며 달리는 마을버스는 우리네 서민들의 흔들리는 삶의 동행자였다. 그렇게 우리네 고향집으로 가는 길목을 이어주었다. 어쩜, 모두가 힘든 여정을 마다 않고 고향을 찾아 나서는 것은 성묘의 의미도 있겠지만 끝내 삭일 수 없는 그리움 혹은 모성애를 되새김질하기 위한 귀중한 시간의 투자 행위이다.
그러기에 설날은 즐겁고 성스러우면서 겸허한 나와, 따뜻한 가족과의 만남이라는 그런 공동체로 내일을 꿈꾸는 희망 다지기 행위이리라. 때로 객지에 살면서 버겁고 힘들고 지쳐 있었을지라도 더 낮은 곳에서 낮게 낮게 가슴 내려놓고 사는 시골사람들의 어질고 낙천적인 삶을 배우는 소중한 시간과의 만남인 것이다. 그래서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고운 이빨을 보듯" 내 스스로 당당하고 희망찬 새해를 다짐하며 귀경길에 오를 수 있는 것이리라.